암이라는 트라우마는 불안으로 시작한다.
환갑을 넘긴 여성 A 씨는 지금까지 쉴 틈 없이 살아왔다. 나름 학교 선생님으로 계속 일을 하며 정년은퇴를 했고 인생에 굴곡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중요한 순간마다 그때그때 현명한 판단을 하면서 고난을 헤쳐왔다고 생각한다. 하나뿐인 딸도 번듯하게 키워 지금은 대학교수로 있고 결혼해서 이제 3살 된 손주도 있다. 딸 부부가 둘 다 직장일로 바쁘다 보니 딸을 위해서 손자 육아를 도와주고 있다.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딸이 더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도와주기로 했고 손자를 직접 키우다 보니 정이 더 간다. 몸은 힘들어도 소소한 즐거움은 있던 와중에 병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정기 검진에서 유방에 암이 의심되니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해보라는 것이다. 집 근처에 유방 전문병원을 가서 조직검사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유방암을 진단받았고 다행히 많이 진행이 된 상태는 아니라 암 인근 유방만 절제하고 남은 유방은 보존할 수 있으니 어서 수술 날짜를 잡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A 씨 생각에는 너무 서둘러 결정하는 것 같아 불안해졌다. 진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암 수술인데 좀 더 큰 대학병원에 가야 하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된다. 우선 빠른 일정보다는 2달 정도 뒤로 예약일을 잡아 놓고 다른 대학병원 진료를 예약하고 진료를 봤다. 그런데 대학병원 교수님은 암이 생각보다 진행된 상태라 한쪽 유방은 모두 절제해야 하고 항암 화학요법은 당연하거니와 상황에 따라서 방사선 치료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A 씨는 더 불안해졌다. 그냥 간단한 수술을 하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유방 전절제에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라고 하니 무서워졌다. 이 병원도 뭔가 잘못 판단한 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인터넷을 통해 유명한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명한 대학병원 교수님 출신으로 지금은 개인병원을 하는 원장님이 유방암이 있는 조직만 떼어내는 간단한 치료법을 한다는 기사를 보고 그 병원을 찾아갔지만 이미 암 크기가 커서 이런 시술은 할 수 없다며 오히려 핀잔만 들었다. 억울하고 화도 나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차라리 이럴 거면 서울에 있는 암만 전문적으로 보는 더 큰 병원에 가서 더 의견을 들어봐야 할 것도 같다.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처음 유방암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지 2개월이 지나갔다. 더구나 A 씨는 이 모든 과정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다. 암을 진단받을 때도 보호자 없이 혼자 갔다. 자기 혼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딸에게 괜히 이야기해 봐야 호들갑만 떨고 괜히 중요한 시기에 일하는데 방해만 할 것 같다. 수술할 병원이 정해지고 날짜가 잡히면 그때쯤 딸에게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거라 A 씨는 생각한다.
'큰 병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근데 이 말이 꼭 몸에만 해당하는 건 아닙니다. 병은 몸도 망가뜨리지만 정신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정신이라면 마음도 있을 거고, 생각도 있을 텐데.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병이 우리의 판단력을 얼마나 흐리게 만드느냐입니다. 아무리 똑똑했던 사람이라도 큰 병을 맞닥 뜨리게 되면 무얼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얼어버리고 평소답지 않은 엉뚱한 판단을 해 버립니다. 즉 '큰 병 앞에는 장사도 없지만 박사 없다.'입니다.
문제는 불확실성에서 시작합니다. 특히 암을 진단받는 시점에 이 불확실성은 극대화됩니다. 불확실성이란 뭐가 정해진 게 없다는 거죠. 이 암 덩어리가 어느 정도로 심한 상태인지, 치료는 가능한지, 치료를 한다면 어느 정도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후유증은 없을지, 치료한다고 나을 수는 있는지, 재발을 하진 않을지 등이 머리 안으로 쏟아지지만 어느 것 하나 감을 잡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결국 불안을 자극하고, 그 불안의 끝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아직은 암으로 인해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근거도 없음에도 내 머리 안에서는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이 생각을 지배합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 우리의 판단은 얼어버립니다. 순간순간 털어내 보려 애를 쓰고 괜찮다고 다독여 보지만 이 공포는 나도 모르는 사이 다시 내 머릿속을 잠식합니다.
의사로부터 암 진단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상황을 떠올려보면 많은 암 경험자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 아침,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보호자와 반드시 같이 오라고 했다는 거죠. 그때 이미 '아! 뭔가 나쁜 상황이구나!'를 직감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그 기억을 불편해합니다. '아니, 내 몸이고 내 암이고 내가 진단받고 내가 치료받는데 왜 보호자랑 같이 오라 마라야.' 그리고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사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또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거죠. 저도 처음에는 병원에서의 이런 조치가 과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건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는데 미국도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암을 진단받았을 때 그 불확실성과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우리 생각을 지배했을 때를 생각한다면 혼자서 그 모든 상황을 감당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복잡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땅굴을 파고 있을 때 나를 붙잡아 줄 사람은 나와 정서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죠. 그건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이든, 이웃이든 누구든 지금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힘들고 중요한 시기를 주변 도움 없이 홀로 헤쳐나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이나 의사의 말에 무작정 의존하고 쫓아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 상황에서는 내 판단을 온전히 신뢰해서도 안됩니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경우는 대부분 어르신, 특히 어머니에서 자주 있습니다. 남편에게 이야기하려니 미덥지 못하고 호들갑만 떨 것 같고, 자녀에게 이야기하려니 짐이 되어 버리는 자신이 싫습니다. 세상 물정이라도 잘 모르면 스스로가 불안해서 도움을 요청하겠지만, 어느 정도 학력도 있고 사회경험도 있는 어머니는 스스로의 능력을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혼자 감당해 보려 하지만, 암의 상황은 녹녹하지 않기에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암이라는 상황은 트라우마이기는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헤쳐나가고 견뎌나가야 할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의 여러 선택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진단 이후에는 여러 가지 치료의 방향 및 환경을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정하고 치료를 받는 것이 이후 암으로부터 생길 수 있는 여러 부정적인 상황을 줄여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까운 사람과 함께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현실적인 고민과 판단을 해 나가야 합니다.
암 진단 이후, 흔히 빠지는 고민들이 있습니다. 이 병원에서 진단한 결과가 맞을까? 이 병원에서 제시하는 치료 방향이 맞을까? 서울에 있는 더 유명한 대학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 하루라도 더 빨리 치료 가능한 병원으로 가야 않을까? 더 힘들고 강한 치료를 받더라고 암을 완벽히 치료하는 게 낫지 않을까? 요즘 이런 신기술이 있다는데 새로운 치료를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주변의 누구는 이렇게 해서 암이 치유되었다는데 그걸 해야 하지 않을까? 기타 등등 수도 없이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
불확실성이 커지면 우리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어쩌면, 만약에, 혹시나' 식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다 보면 필요 없는 생각이 많아지고 그에 따른 고민도 많아집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답은 안 나오고 그러니 더 불안하고 답답합니다. 이런 고민들에 대한 건 개개인의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정답이란 없습니다. 그래도 그 고민을 풀어나갈 몇 가지 원칙은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원칙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혼자 고민하지 말고, 스스로의 판단을 온전히 믿지 마세요.
앞서도 계속 이야기했지만, 암이라는 거대한 트라우마는 헤쳐나가야 할 현실적인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절대 혼자 감당하지 말고 믿을 수 있는 가까운 주변의 사람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의 도움은 진단 시점뿐만 아니라 암을 치료하는 시기, 그 이후 일상을 회복하는 시기까지 계속 필요합니다.
2.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암 치료는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입니다. 암은 이제 급성질환이 아니라 만성질환이거든요. 진단 시점에는 이제 마라톤의 시작 시점에 서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초반에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뛰어가면 안 됩니다. 암은 지금 진단받았을 뿐이지 내 몸에서 지금 막 생긴 병이 아닙니다. 꽤 오랜 기간 내가 몰랐을 뿐이지 내 몸 안에서 서서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더 기다린다고 해서 갑자기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당장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나의 암과 관련해서 지금 얻을 수 있는 여러 검사 결과들을 종합해서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3. 삶의 현실을 함께 고려하세요.
암을 진단받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주어진 삶을 다시 지속해야 합니다. 그건 직업과 같은 사회적 역할도 있고, 가족 및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도 있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의 삶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암을 치료하고 그 이후 관리를 하는 상황에서도 내가 삶을 살아가는 그 환경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간혹 모든 가족이 연세 있으신 어르신을 모시고 치료를 위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함께 올라오는 경우를 봅니다. 가족이 주변에 숙소를 구하고 돌아가면서 간병을 하는데 비용도 만만치 않거니와 생활을 제쳐두고 온 터라 부담이 됩니다. 치료도 중요하지만 그 치료 환경이 삶의 환경과 서로 충돌해서는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4. 과도한 정보를 경계하세요.
정보의 홍수 속에 살면서 다양한 지식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유익한 일입니다. 다만 필요할 때 바로바로 찾는 것이 과해져서 불필요하게 자꾸자꾸 찾는 것이 되어 버리면 그때부터는 독이 됩니다. 특히 암에서는 그렇습니다. 암에는 너무 다양한 상황이 있습니다. 기적 같은 상황이 있고 절망적인 상황도 있습니다. 양극단의 상황에 대한 정보는 불확실성에서 판단을 더 혼란스럽게 합니다. 이럴 때는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한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국가암정보센터나 주요 대학병원 암병원에서 홈페이지나 유튜브를 통해 제공하는 정보가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영어가 되시는 분이라면 미국의 공식 암 관련 기구 홈페이지를 보는 것도 좋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지나가는 말도 경계해야 합니다.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의 암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나의 의료진입니다. 부족한 정보에서 제안하는 조언은 아무래도 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욱이 암과 관련된 마케팅이 만연하는 시기입니다. 암과 관련된 고객, 특히 호갱이 되는 건 조심해야 합니다.
5. 병원과 의사, 간호사를 잘 활용하세요.
병원과 의사를 신뢰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때로는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의료 환경이 대학병원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어서 암 치료를 하는 환경 역시 차분하기보다는 어수선하기 때문이지요. 의사와 진료하는 시간은 몇 분 밖에 안될 수도 있고 검사 및 치료를 하는 과정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암을 잘 치료하기 위해서 병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진료 일정에 급하게 가서 부랴부랴 진료를 받기보다는 조금은 일찍 가서 접수나 대기, 진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진료 환경에 조금 익숙해지면 주치의사를 만났을 때도 짧은 시간이라도 차분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궁금한 점은 미리 적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의사도 사람인지라 다른 의사와 비교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른 병원에서 진료받고 권유받은 치료가 있다면 진료 초반에 간략히 언급하고 지금 만나는 의사를 존중하며 종합적인 소견을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간호사를 진료보조 정도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특히 암 진료에서든 더욱 그렇습니다. 암 진료 상황에서는 교육이나 설명 등 많은 역할을 간호사가 담당합니다. 암 병원내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전문간호사를 잘 활용하면 질문의 교통정리를 하게 되면서 담당 의사와 의논해야 할 주제가 정리되고 의사와의 진료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여러 상황에도 불구하고 암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은 결국 스스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내 몸이고 내가 받게 될 치료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은 필요합니다. 앞으로 진행될 암과 관련된 여러 상황들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예상치 않은 난관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 순간순간은 견디고 버티고 또 그 상황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 선택이 매번 최고의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걸어 나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에 대한 가치와 의미, 품위를 잃지 않고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옆의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얻는 지지와 도움은 필요하고 소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병을 치료해 주는 의료진을 신뢰하고 잘 활용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은 암이 만들어 내는 공포의 파도에 휩쓸려 가지 않고, 그 파도를 타 넘으며 앞으로 항해하는 배가 되어 그 힘든 과정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http://cancer.snuh.org/info/classification/list1.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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