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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Jul 19. 2022

예원학교에 진학하다.

예체능 교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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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예중 가는 것을 방해하고 싶었다. 5학년이 되자 미술학원 원장 선생님은 예중 준비반을 들어오라고 설득하셨다. 5학년이면 중학교 진로를 정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고 예중이라는 곳에 가려면 최소한 2년은 준비해야 했다. 그림에 문외한인 데다가 예체능계에 대한 선입견도 있었던 나는 가능한 그 길을 피하고 싶어서 아이가 잘 다니고 있던 미술 학원을 접었다. 미술 학원 선생님은 토선이(아이 예명) 같은 아이는 결국은 미술계로 들어오게 된다고,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 돌아서라도 이 길로 오게 될 거라고 돌아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미술학원을 다니지 않았지만 아이 곁에는 작은 스케치북과 각종 연필이 떠나지 않았다. 동물, 만화, 옆 집 아줌마, 할머니, 닥치는 대로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성동구 수학 영재 프로그램에도 등록이 되어 한 달에 한 번인가 수업을 받으러 갔다. 아이가 6학년이 되면서 나의 고민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내 마음대로 아이 인생을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의심이 생겼다. 오오. 이럴 땐 여행이지. 나는 통장을 탈탈 털어 유럽 배낭여행을 가기로 했다, 무려 두 달에 가까운 여행 계획을 세우고 학교에 '선언'하러 갔다. 나는 미술학원에서도, 학교에서도 대책이 없는 학부모였는데 나는 그만큼 무모하기도 했고, 여차하면 검정고시도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입시 교육계에 오래 있으면서 한 가지 얻은 진리는, 객관적 데이터가 바탕이 된다면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뭐 복잡한 이야기를 다 접고, 내가 떠나고 싶었다. 애가 중학교를 진학하고 나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놀고 싶었다.


유럽여행을 다녀온 후, 세상의 명작이란 명작의 반 이상을 본 아이는 예중에 진학하겠다고 했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예중이라는 데가 재벌급 집안 애들만 다닌다는데.. 일 년 학비가 얼마지? 비로소 현실적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유럽 여행은 나의 치기와 오랜 바람으로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서 다녀온 것이지 당시 나의 경제력은 형편이 없었다. 2년 전 그만둔 미술 학원을 찾아갔다. 예중반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 어머니. 지금이 5월인데 입시를 5개월 하고 예중에 합격하긴 어려워요."

" 알고 있어요. 한 번 해보는 거예요. 혹시 안되면 일반 중학교에 가겠어요. 그리고 학교는 오전 수업은 하고 오겠습니다. 학교에서 출석을 꼭 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선생님, 이런 말씀 무례하지만 5개월 하고 합격은 저도 무리인 거 알고 있어요. 말 안 들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5개월간의 예중 입시가 시작되었다. 토선은 첫 연합 시험(몇몇 미술학원이 모여서 치르는 시험. 잘 그린 그림에 스티커가 붙여지는 평가 방식이었음)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겨우 형태만 그려낼 수준이었다. 그러나 한 달 후 연합 시험에서는 3위 안에 들었고, 한 번은 일등을 하기도 했다. 미술학원은 들쑥날쑥 다녔지만 아가 때부터 '우짜든 동'그림을 그려온 구력이 힘을 발휘했다. 토선의 묘사에는 한 끗이 있었다. 입시를 두어 달 앞두고 실기 수업 시간은 하루 12시간을 넘어갔다. 아이가 육체적으로 힘든 것도 힘든 것이었지만, 타임 수만큼 지불해야 하는 수업료가 내게는 버거웠다. 그리고 영어나 수학을 공부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회실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하루 세 타임씩 수업료를 부담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다른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테니 주 1회는 쉬게 해 주세요. 예중 입시가 목표가 아니라 계속 그림을 하는 게 목표니까 이해해 주세요" 


입시생이 세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원장님의 자녀였다. 다행히 원장님은 나의 사정을 잘 이해해 주셨고, 토선은 하루 동안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고,  작은 몸을 쉬게 할 수 있는 시간도 얻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났고 가을이 오고 있었다. 그즈음 토선은 연합 시험에서 거의 일등을 하다 시피했고 화실의 자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입시 구력이 짧은 만큼 수채화는 업다운이 심했다. 어떤 친구들은 개인 수업을 받는 등 합격에 매진하고 있었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잘 그린 수채화 작품을 더 많이 보기로 했다. 안목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성장의 지름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공부도 그렇다. '공부'의 수준이라는 것이 원체 다양해서 시간만 들인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었다. 


입시날이 되었다. 입시는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하루는 드로잉, 하루는 수채와 그리고 간단한 학과가 함께 치러졌다. 우리 집에서 예원까지는 지하철까지 걸어서 7분, 지하철 두 번 타고 30분, 서대문 역에서 걸어서 13분 대략 한 시간 거리였다. 합격한다고 해도 이 길을 매일 오고 간다니 나의 마음은 젖은 낙엽을 안은 듯 착잡했다. 시험이 치러지는 이틀간 나는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데리고 왔다. 오후에 일을 하기가 힘들었지만 아이의 첫 입시, 그 떨리는 현장에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긴장되는 수채화 시험 날, 다른 친구들보다 좀 늦게 나오는 토선을 보자 왈칵 눈물이 났다. 하지만 아이는 방글 방글(아.. 그때는 열세 살. 방글거릴 때였다 ^^) 거리며, 엄마엄마 주제가 뭐가 나온 줄 알아? 개야 개. 개를 그리라고 했다고. 

그즈음 아이는 강아지를 강렬하게 키우고 싶어 했고 '세상의 모든 개'라는 책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었다. 매일 '개 그림'을 그린 건 당연했다. 그런데 입시 주제로 개가 나오다니. 


며칠 후 아이는 고대하던 예원학교 합격 전화를 받았다. 문자로 받았던 것 같다. 채 돌이 되지 않은 아가가 색연필을 들고 무엇인가를 막무가내로 그리던 때가 생각났다. 예술보다는 좀 더 '먹고 살기' 확실한 공부를 시키고 싶어 고민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어떤 길을 가지 말아야 하는 데는 백가지의 이유가 있지만, 가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가야 하니까. 


열세 살. 늦은 가을날. 토선은 그렇게 예원학교에 합격하였다. 

예술가의 길로 한 발짝 들어 선 역사적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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