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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May 21. 2022

2007년 3월. 이탈리아 로마로 떠나다.

<2007년 13살 딸과 좌충우돌 유럽여행 >-예중 준비 대신 유럽으로!

2007년. 아이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큰 고민에 빠졌다. 언제 어디서나 펜과 종이를 들고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진학 문제 때문이었다. 예술 중학교에 진학하자니 일찍부터 진로를 정하는 것도,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이 모인다는 사실도 우리 형편에서는 부담이었다. 교육 문제만큼은 진지했던 나는 이쯤에서 큰 결단을 내렸다. 여행을 가자! 나는 통장에 있는 현금을 탈탈 털어 한 달이 넘는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가족들도 학교 선생님도 말렸지만 지금이 아니면 갈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3월 18일 비행기에 오른다. 다음은 그날의 이야기이다.







살다 보면 그때 참 잘했어.라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2007년 3월 18일 아침 9:30분이 그랬었다. 13살의 혜리와 나는 손을 꼭 붙잡고 인천 공항으로 들어섰다. 대략 20시간 후면 우리는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친구에게 빌린 어설픈 돌돌이 트렁크를 손에 들고 쉬크함은 눈곱만큼도 없는 시꺼먼 백팩과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메고 있었다. 한 달이 훌쩍 넘는 여행기간이라 약간의 겨울, 봄, 그리고 여름 등 여러 계절이 걸쳐있어 짐 무게가 상당했다. 로밍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후 비장한 마음으로 애니콜 폴더폰 전원을 끄고 가방 깊숙한 자리에 넣었다.      

 

우리 이제 출발하는 거야.


이탈리아가 어딘지 알아? 엄마는 어릴 때부터 ‘해외의 모든 아이들이라는 프로그램이 좋았어.  아이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가고 싶었는데 드디어 가는 거야. 엄마  따라다녀야 . 알겠지? 여권번호랑 이름 한국 주소 적힌 메모 절대 잃어버리면 안돼. 엄마 놓치면 경찰한테만 부탁해야 . 스위스  때까지는 한국 음식을  먹을 거야. 괜찮겠어? 이틀에  번씩 수학 익힘 풀자. 돌아가면 바로 학교 가야 하니까. 그리고 돌아와서 그림이 하고 싶으면 해도 .      


엄마 내가 카메라 가방 들까? 무거워 보여.


재밌겠다. 외국 사람들이랑 같이 놀 거야.      


당시 내 통장에 현금이 2000만 원쯤 들어있었다. 비행기표, 저렴한 숙소를 예약하고 500만 원 정도를 선납했다. 여행경비를 아무리 짜게 잡아도 700만 원은 들었다. (700만 원은 무슨.. 마지막 여행지였던 런던에서 일주일 동안 300만 원을 쓰는 기염을 토했다 ) 통장이 텅 비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마음이 든든했다. 돌아와서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때를 놓치면 영원히 혜리와 둘이 유럽 배낭여행을 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지하철 막차를 타는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경유지인 나리타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비로소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하는 현타가 왔지만 이미 날아오른 비행기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인생의 대부분은 저지르고 되돌릴 수 없음에서 시작된다.                 


 이탈리아 다빈치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시각으로 밤 10시 30쯤이었다. 여행 떠나기 전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한 밤중에 도착해서 민박집주인을 어떻게 만나나, 만나지 못하면 택시를 어떻게 타나였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울라라!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나는 더욱 혜리 손을 꼭 쥐어야 했다. 한국의 공항에 비하면 이곳은 거의 시외버스 터미널 수준이었고 아프리칸들과 집시 같은 사람들이 (당시엔 경험도 철도 없어서 무서웠다) 여기저기 서성이고, 이민 가방 같은 엄청난 짐 가방을 두고 온 가족이 눕다시피 하는 등 내 눈엔 안전한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으로 겁이 났던 사실은 영•어•가•통•하•지•안•았•다! 멀리 경찰이 보여서 달려가 뭔가를 질문하려 했더니, 경찰들이 아예 본 척도 하지 않고 no no 하며 도망가버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게다가 비행기 내릴 때 보니까 비가 오고 있었다. 입국 절차도 하는 둥 마는 둥 절차랄 것도 없었다. 돌덩이를 삼킨 기분으로 밖으로 나왔더니 한국인으로 보이는 신부님이 보였다. 다짜고짜 달려갔다. 여전히 혜리 손을 꼭 잡고, 큰 짐가방은 끌고, 등엔 시꺼먼 가방을 메고.


한국인이세요?


네.


신부님, 저 오늘부터 애랑 여행 시작인데 강복 좀 해주세요. 안전하기를요. 부탁드려요.


거울을 보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부탁했다.

신부님은 우리 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기도를 해 주셨다. 두 사람을 지켜 주소서. 아멘이 저절로 나왔다. 신부님 보기에도 한심하고 걱정스러웠는지 명함을 주시며 곤란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하셨다. 신부님의 강복 후 나는 평정심을 찾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주의 기운을 모아 집중력을 발휘하여 한 바퀴 휘익 둘러봤다. 빨간색 잠바를 입은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중을 나온다고 했던 민박 주인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박 주인이신가요?


맞소. (이 말투는… 부부 부북 조선 )


어쩔 수 없었다. 지구 상에 뭔가 끈이 있는 사람은 이 아저씨밖에 없는 상황이라 긴장을 잔뜩 하고 다른 예약자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 다른 곳은 호텔을 예약했었지만 이탈리아는 한 밤중에라도 픽업을 온다기에 민박을 예약했었다. 예약자들이 다 모이자 차로 이동했다. 얄궂은 봉고였는데 여러 사람이 타기엔 좀 좁았었다. 차는 민박집을 향해 출발했다. 비는 제법 창을 두드렸다.


나무. 키가 큰 나무들이 시커먼 밤에 장병처럼 우리를 맞아주었다. 로마라니. 나 로마에 왔다고!! 혜리야 혜리야 여기가 로마야. 우리가 왔다구. 거리라고 할 것도 없이 노쇠한 건물들이 듬성듬성 보였지만 내일이면 콜로세움을 보리라는 흥분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발작적인 기침이 터져 나왔다. 초여름 날씨라고 하더니 갑작스러운 이상기후로 저온현상에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다지. 콜록콜록. 조금 전까지의 공포는 아랑곳없이 슬슬 흥분이 심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이는 눈을 또랑또랑 거리며 로마를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가 얘기했다.


오른쪽에 전기불 보이는 데가 콜로세움이요.


아침에 가보시요.


숙소에서 20분 걸어가시오.


우리는 그렇게 로마와 인사했다.



>>>계속>>>>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는 둘 다 어렸다. 철없는 엄마와 철이 일찍 든 열세 살짜리 딸아이는 생각하는 바가 크게 차이가 없었다. 당시 휴대폰도 없이, 해외여행 경험도 없이, 빌려온 싸구려 여행 가방을 이고 지고 용기 하나만 가지고 떠났다. 그 기록을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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