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4개월차 돌아보기 - 메일링 가을호 3편
인턴 생활도 어느덧 세 달이 지났다. 해외에서 일해보는 것은 처음이라 모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직접 겪어보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지난 세 달은 첫 경험이 남긴 기쁨과 혼란으로 가득했다.
기쁜 것들.
프랑스에서 여름휴가는 듣던 대로 충분히 보장된다. 나의 경우에는 매니저가 처음에 예고한 2주 휴가보다 1주가 더 늘어난 총 3주간의 휴가를 가진 걸로 모자라 그다음 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을 더 쉬면서 나 역시 휴가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노는 날도 여럿 있을 정도로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 기간 일 때문에 몇 번 사무실에 나간 적이 있는데 사무실이 텅텅 비어있을 정도로(때로는 한 층에 다섯 명 이하의 사람만이 남아 있기도 했다) 모두가 휴가를 떠난 분위기였다. 출퇴근 지하철이 텅텅 비어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유럽 지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여름 동안엔 요청한 자료를 받을 일도 없고 자료 요청이 들어올 일도 없기 때문에 그 기간엔 딱히 일을 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다. 회사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공식적인 여름휴가는 각자 2~3주 정도지만 서로 겹치치 않게 휴가를 잡으니 결과적으로는 여름 내내 대체로 일이 여유로운 편이다. 그래서 이 때는 밀린 재고 정리라든가 너저분한 창고 정리 같은 평소에 각 잡고 하기 어려운 일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우리 회사에는 여름 내내 ‘Summer Friday’라는 제도가 있어 6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매주 금요일은 13시에 퇴근이 가능했다. 보통 금요일 오전에는 출근을 따로 하지 않고 재택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팀원들과 간단한 미팅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주말을 좀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
삶의 질을 높여주는 또 다른 요소는 할 일이 다 끝났을 때 사무실에 하릴없이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해진 근무 시간은 아홉 시 반부터 여섯 시까지 지만, 그날 해야 할 일을 예정보다 일찍 끝냈을 경우 매니저는 할 일도 없는데 굳이 사무실에 남아 있지 말고 집에 가라고 한다. 그래서 정오에도, 두 시에도, 네 시에도 집에 가봤다. 내가 일을 다하면 퇴근시킬 거라는 걸 아니까 뭔가 쓸 데 없이 일을 늘리거나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빨리빨리 효율적으로 일을 쳐내고 매니저에게 일을 끝냈다고 보고를 한 후 (운이 좋다면) 쿨하게 집에 가는 편이 나으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고.
혼란스러운 것들.
일에 인생의 전부를 쏟을 필요가 없다는 게 한국인을 얼마나 혼란스럽게 하는지! 처음에는 매니저가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없으니까 그냥 쉬라고 연락이 오면 오늘은 또 뭐하고 놀까 신나기만 했는데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될수록 ‘이래도 되나?’ 싶어서 불안했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내가 맡은 직무는 꽤 단조로운 편인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에 비해 덜 바빴고 그만큼 별다른 보람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몸은 편하니까 ‘이 낯선 느낌은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대체 어떤 것이 더 나은 건지 혼란스러웠다. 막상 여유가 생기니까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황당한 경우가 많았고 내 인생에 일을 빼고 나면 별 다른 게 남지 않는구나 싶어 서글퍼졌다. 사실 이렇게 여유로운 직장 생활을 꿈꾸며 프랑스에서 석사 유학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는데 막상 진짜 상상한 대로 되니 팔자 좋게도 일을 뺀 인생이 너무나 권태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혼란에 시달리다 내린 결론은 이제 일의 의미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
나에게 일이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제일 재미있는 것이어야 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루 종일 해야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 자체가 공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좋아해서 선택한 일에 몇 년을 바치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찾아 헤매다 이곳에 도착했더니, 이제 더 이상 일이 그 정도의 의미를 갖지 않는 거다. (직업으로서의) 일은 그냥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고 그것이 꼭 자아실현과 연결될 필요가 없다는, 개인적으로는 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됐다. 게다가 일을 하면서도 몸과 마음에 여유가 있다 보니 밥벌이으로서의 일 이외에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갈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메일링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개인적인 뿌듯함을 줄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덕분에 더 이상 정체 모를 혼란스러움과 자괴감도 사라졌다. 더 이상 남이(또는 회사가) 나의 기분과 존재 의미를 좌지우지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돈벌이와는 별개로 내가 몰입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 나만의 작은 꽃을 피워보고 싶다.
무엇보다 좋은 건 이 모든 행위의 주체가 나라는 사실이다. 능동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벌여도 보고 그 일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질 거라는 사실이 삶을 온전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그 때문에 주말여행을 다녀온 일요일 저녁에도 졸린 눈을 비비며 오롯이 정신력으로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 고충이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