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친구 사귀기 - 메일링 가을호 5편
프랑스에서는 수아레(Soirée)라고 불리는 파티 문화가 보편적이다. 다 같이 아는 지인끼리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경우도 있지만 와인과 맥주, 간단한 안주를 중심으로 지인의 지인, 지인의 지인의 지인까지 함께 모이는 경우도 많다. 생일 파티일 경우에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 인물의 모든 주변인이 - 내가 갔던 친구 생일 파티에는 그 친구의 고등학교, 프레파, 대학교 친구에 동네 친구까지 - 한 자리에 모이기도 한다. 그래서 수아레에 초대받았다는 것은 곧 모르는 사람들과 저녁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 프랑스인들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거부감이 없고 심지어 내가 속한 경영 학교는 동문 간의 네트워킹이 존재 이유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즐기고 그래서 이런 자리를 일 년 내내 끊임없이 만든다.
대부분 수아레는 이런 식이다. 함께 나눠 마실 술과 간단한 안주를 사 간다. (주최자가 먼저 장을 보고 참여 인원만큼 나눠서 모두가 돈을 보내주는 경우도 있다.) 초대받은 집에 도착하면 보통 술이 모여있는 테이블이 있고 그 테이블 위에 각자가 사 온 것들을 늘어놓은 다음, 하나둘 함께 나눠 마신다. 본인의 술잔이나 맥주병을 들고 일단 아는 얼굴이 있으면 찾아가 인사를 하고(내가 좋아하는 비쥬를 곁들인), 그 지인과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일 경우 그 지인이 서로를 소개해 준다. 그렇게 서로의 이름을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대화에 녹아들다 보면 또 나를 아는 사람이 나를 보고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 또 그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간단히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보면 마가 뜰 때가 있는데 그때가 또 기가 막히게 자리를 옮길 타이밍이다. 보통 어떤 인물과 대화를 시작하는 문장은 ‘salut, ça va?(안녕, 잘 지내?)’ ‘ça va et toi?(잘 지내, 너는?’)이며 그다음부터는 각자의 역량에 따라 대화를 이어나가면 된다. 학교 친구들일 경우에는 학교 얘기나 인턴 얘기가 주를 이루고 진짜 접점 전혀 없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냥 주로 일 얘기나 취미 얘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래도 내가 한국인인 만큼 그들이 아는 한국 문화(아무래도 요즘 같으면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겠지)에 대한 얘기가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다 운이 좋으면 처음 만났지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런 경우에는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후에 따로 만나 좀 더 친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더욱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날 파티에 잘생긴 사람이 있으면 와인을 몇 잔 마신 후 신나게, 하지만 티는 안 나게 슬쩍 말을 걸어볼 기회도 생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서로를 탐색하기 좋은 만남의 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미팅이나 소개팅이 아닌 수아레에서 인연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미 판도 깔려 있겠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경우가 없지.
사실 수아레 같은 경우는 하룻밤에 일어나는 일이고 그날 만난 사람들을 다음에 다시 만날 일이 없는 경우도 많아서 오히려 더 편하게 즐기고 오는 편이다. 워낙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기도 하니까. 반면 최근 들어 내가 스몰토크가 피곤하다고 느낀 건 회사에서다. 정말 모든 층이 조용했던 여름이 지나가고, 재택도 더 이상 자주 안 하는 지금은 인턴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원들이 사무실에 출근한다. 회사에서는 대체로 점심을 카페테리아나 테라스에서 함께 먹는 분위기라 같은 인턴끼리 모이게 되는 경우가 잦다. 처음에는 같은 학교 출신 친구들과 먹는 경우가 많아 주로 학교 수업이나 행사 등 겹치는 주제로 대화를 했기 때문에 오히려 편했고 몰랐던 알짜 정보도 많이 알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각자 회사 내에서 아는 친구들이 생길수록 판은 점점 커졌고 내가 어디 팀에서 무슨 일을 하는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 일이 늘어갔다. 테이블에 앉는 인원이 늘어날수록 모두가 함께 대화하는 일이 불가능했고 잘 모르는 옆 사람과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경우도 자주 생겼다. 딱히 접접이 없는 경우에 대체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하는지도 고민이었을뿐더러 초반에는 대개 ‘일은 어때?’로 대화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실 이걸로 대화가 쭉 이어지기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금방 깨달았다. 일이 거기서 거기지 뭐 어때. 거기서 상사 욕을 할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적당히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으면서도 너무 깊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주제를 찾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에 대해 까야하는지 그 적당한 선을 찾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고.
그래서 점심시간만 되면 그냥 어디론가 뿅 사라지고 싶은 때가 있었다. 날씨가 지금보다 따뜻했을 때는 점심을 사서 혼자 회사에서 5분 정도 있는 공원에 갔다. 그 잠시의 자발적인 외로움이 하루를 버텨낼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덧 밖에서 밥을 먹기엔 뼛속까지 시린 날씨가 되어버렸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인턴들 사이에 끼어 밥을 먹다 보니 놀랍게도 점점 친밀감이 드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대화란 하면 할수록 서로 간의 어떤 맥락이 쌓이고 그 맥락 덕에 새로운 주제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아 지는 것. 그래서 이제 예전만큼 함께 점심을 먹는 게 막막하지 않고 오히려 퇴근하고 한 잔 하러 가자는 말도 할 정도로 편해졌다. 인생은 때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인턴을 하다 만난 친구들과 가까워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벽 또한 스르르 무너지고 있다. 여전히 깨부술 수 있는 벽이 있다는 것, 그래서 매번 새롭게 도달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 그게 인생의 재미-라고 여전히 생각할 수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