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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파랑 Dec 13. 2021

20. 우울할 때 공원을 가, 그리고 기분이 좋을 때도

공원 예찬 - 메일링 가을호 4편

파리에는 공원이 많다. 뛸르리(Jardin des Tuileries)나 뤽상부르(Jardin du Luxembourg),빨레 호아얄(Jardin du Palais Royal)처럼 이름난 관광지인 공원들 뿐만 아니라 그보다는 덜 알려진 큰 규모의 공원들, 스퀘어라고 불리는 작은 사이즈의 공원까지 포함하면 대략 437개의 공원이 있다고 한다. 보통은 벤치와 분수, 잘 가꾸어진 꽃과 나무들이 기본 패키지처럼 있으며 점심시간에는 테이크 아웃 샌드위치나 샐러드를 든 직장인들로, 평소에는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운동을 하는 파리지앵들로 가득하다.


내가 공원을 가게 되는 상황은 주로 다음과 같다.

날씨가 좋아서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커피 한 잔 마시며 쉬고 싶을 때,

오랜만에 해가 떠서 광합성을 하고 싶을 때, 

주말에 약간 지루하지만 방해받지 않고 안정적인 코스에서 달리기를 하고 싶을 때,

집에서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만 들여다보다가 자괴감이 들 때(나가서 책이라도 읽어야지),

쓸데없이 마음이 번잡스럽고 생각이 많을 때,

혼자 샌드위치나 샐러드로 점심을 해결할 때,

친구들과 간단한 점심을 먹을 때. (레스토랑 가기 돈 아깝고 어차피 금방 일어나야 할 때,

퇴근을 일찍 하게 된 날, 노트북을 들고나가서 글을 쓸 때.


다시 말해, 공원은 나에게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 해 준, 비가 오는 것만 아니라면 돈을 안 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만능의 공간이다. 어학원을 다니던 유학 초기에는 남는 게 시간이라 외출할 때면 늘 작고 가벼운 책이나 이북리더기를 들고나갔다. 발길 닿는 대로 산책을 하다가 아무 공원에나 들어갔고 벤치에 앉은 채로 파리지앵들을 구경하다 보면 늘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독서에 대한 열망이 특별히 높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주위를 둘러보다 보면 다양한 연령대의 책 읽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게 속된 말로 ‘본새’가 나보였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런 행동들을 따라 하게 됐다. 또 그러다 보면 책에 금세 몰입하게 돼서 절대 끝낼 수 없을 것 같던 책도 후루룩 읽어내곤 했다. 시간은 공원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멈춘 듯했고 그 차분한 리듬 속에서 나는 지친 마음을 보듬었다. 어느 날에는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해 이런 메모를 휘갈겼다. 


'뤽상부르 공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잔잔한 바람에 실려오는 꽃향기를 알아채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럼 나는 또 그 순간에 취해 나는 파리를 아직도 너무 사랑한다고 섣불리 내뱉어 버리고 싶어 진다. 어떻게 3년째 같은 풍경을 보며 감탄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3년째 같은 자리에서 사진기를 꺼내들 수가 있을까.’


아마 나를 파리에 붙잡아 두는 건 8할이 공원일 것이다. 공원은 이방인으로서 지독하게 외로운 순간에도 내가 맨땅으로 고꾸라지지 않도록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곤 했다. 공원은 내게 타인과 직접적으로 엮이지 않고서도 그 존재만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토록 예쁜 도시에서 파리지앵들 사이에 섞여 있는 나를 마주하는 게, 뻔하지만 ‘내 삶이 생각한 것보다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게 내가 위로를 받았던 방식이었다. 기분은 백 퍼센트의 확률로 나아졌다. 

공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돈이 많든 적든,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어디에서나 계절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 파리에 똑떨어진 이방인인 나에게도 마치 내가 원래부터 이 도시의 일부인 것처럼 다정하게 곁을 내어줬으니까. 그렇게 공원은 도시의 가장 소외된 사람까지도 안아주는 따스한 공간이다. 이와 관련해 나에게 가장 큰 깨달음을 주었던 유현준 교수의 말로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이전 공공도서관 편에서도 언급한 적 있다. 


‘광장은 필요하죠. 저는 대한민국이 점점 계층 간의 갈등이 심해지는 이유를 공짜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라고 생각해요. 어디 들어가서 앉으려고 하면 돈 내고 들어가 앉아야 해요. 그러면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겨요. 우리나라 커피숍이 많은 이유가 그거예요. 앉을 곳도 없고 길거리에 벤치도 없습니다. 점점 공통의 추억이 사라지는 거죠. 도시에는 공짜로 머물 수 있는 벤치도 많아야 하고 공원도 많아야 하고 광장도 많아야 해요. 그런 것들이 생겨야지만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이 모여서 융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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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주말을 마감의 압박 없이 푹 쉬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잘 쉬고 나니까 다시 달릴 에너지가 생기나 봐요. 이번에는 좀 더 열심히 해서 좋은 글을 보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파리에서 매일이 축제 같은 연말을 지내는 이야기, 인턴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이야기 등 또 새롭고 다양한 주제로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따뜻한 방구석에서 귤이라도 까먹으면서 편안하게 쓱 읽어내려갈 수 있는 글이 되길 바라요. 그게 제가 이번 겨울호를 내면서 제일 원하는 일인 것 같네요. 아무쪼록, 겨울이니까요. 


연말은 별 시답잖은 이야기와 함께 마음을 나누기 좋은 시기인 것 같습니다. 시기를 핑계로 오랜만에 주변 친구들의 안부도 묻고 사는 이야기도 좀 듣고 그러려고요. 그럼 다들 사랑 넘치는 연말 보내시고 저는 잊혀갈 때쯤 새로운 겨울호로 찾아올게요.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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