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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파랑 Jul 25. 2022

25. 나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프랑스 란제리 회사에서 두 번째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사회에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마침내 이곳의 일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이 있었다. 프랑스 사회에 동경이 있었다는 것도 굳이 감추진 않겠다. 4년째 살고 있을 만큼  프랑스를 좋아했고 브런치에 올린 이전 글만 봐도 프랑스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 애정만이 이곳에서의 삶을 이어나갈 동기가 되어주었다,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서 나의 두 번째 인턴은 그렇게도 원했던 너무나 프렌치인 회사에서 하게 되었다. 프랑스가 본사인 란제리 회사의 커뮤니케이션 및 피알 포지션으로. 에디터로서의 경력은 꽤 많은 인사담당자들 및 담당 매니저들의 호기심 대상이 됐고 지난 네 달 동안 대략 10개 정도의 면접을 반복한 결과 내가 찾던 방향에 맞는 일을 하게 됐다. 당장 100퍼센트 만족하는 곳은 아니어도 앞으로의 진로를 좀 더 활짝 열어줄 곳이라는 점에서 첫 발은 잘 뗐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나라든 기본적으로 에디터(미디어)- 홍보 대행사- 기업 사내 홍보팀이라는 생태계는 비슷하다. 내가 그동안 에디터로서 했던 일에서 정확히 반대 방향에 놓인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직업 자체나 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처음 해 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적응이 어렵지 않았다. 예를 들면, 제품 사진을 사이트에 업로드한다거나 잡지/홍보대행사에게 촬영용 제품을 보내주는 일을 주로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일해보니, 아직도 내가 프랑스어로 홍보팀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나긴 하지만, 적당히 흥미롭고 적당히 여유롭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머리 아플 일도 없고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다. 물론 옛 일과 머지않은 일을 하다 보니 종종 에디터로서 근사한 창작물을 만드는 일에 대한 미련이 튀어나올 때가 있지만.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맞는 궤도에 다시 탑승했다는 건 확실하다. 다만, 이 ‘프렌치 회사’라는 것의 숨겨진 의미가 이방인이 정말 나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라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최근에 다른 팀에 중국인 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총 인턴 45명 중에 2명만이 외국인인 셈이다. 그러니 우리 팀에 외국인이 나 하나인 건 말해 뭐해.  사실 프랑스어로 업무를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없다. 대화 자체도 예상 범위 내에 있고 예측 불가한 상황이 드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외 사적인 대화들이다. 우리 팀은 주로 팀끼리 같이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최소 네 명에서 최대 여섯일곱 명 정도의 인원의 대화가 테이블 위에서 서로 엉기는데 이런 상황이 종종 불편하다. 대화를 이해해도 끼어들기가 어렵다거나 가끔은 뭔 말인지, 그게 왜 웃긴 건지 조차 이해가 안 된다. 이런 상황들은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마도 영영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니까 세월이 지나면, 프랑스 사회에 점점 적응하면, 자연스레 이 사회에  속하게 될 거라는 나의 기대는 틀린 것이다. 오히려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는 이들과 다르다는 것이 점점 더 강하게 나를 치고 간다. 나는 외딴섬이야.

비교해보면 전에 일했던 직장은 정말 출신 국적이 다양했다. 프랑스 지사가 따로 있었고 우리 지사는 EMEA 지역을 총괄했기 때문에 프랑스 국적자는 아마 40퍼센트도 안 됐을 것 같다. 물론 내 영어도 딱히 완벽하진 못해서(솔직히 말하면 영어와 프랑스어의 불편함 차이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영어가 훨씬 편했던 것 같기도.) 그때도 종종 점심시간의 대화에 자연스레 끼는 게 힘들다고 느끼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전부 이방인이라는 공감대가 훨씬 우리 사이를 가깝게 만들었던 건 틀림없다. 그때는 내가 언젠가는 프랑스 사회에 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이 있었을 때라 이방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더욱 견고히 만드는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지금은 어차피 나는 영원히 이방인일 텐데 오히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방인들이 서로 사기를 북돋아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적어도 마음 둘 곳 하나는 있어야 앞으로의 회사 생활도 무던하게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여전히 내가 사람과의 관계없이 못 사는 그런 인간이라 그런 걸까.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프랑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마음도 이제는 많이 사그라들었다. 어떤 게 너무 좋아서 선택하는 것도 이제는 잘 일어나지 않을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걸 견디고, 어떤 걸 못 견디겠다는 선택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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