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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파랑 Sep 17. 2022

26. 바캉스 후 삶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

프랑스에서는 어른들에게도 방학과 개학이 있다.

9 2 금요일에는 회사 마케팅  팀빌딩이 있었다. 커뮤니케이션 팀에 속해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사 대신 프랑스 패션 학교로 출근했고, 출근 시간도 평소보다  시간이나 늦은 데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15 거리에 있는 곳이라 (평소 통근 시간 지하철+도보 40) 마음도 발걸음도 가벼웠다. 팀빌딩은 건물 강당에서 진행됐는데 오전에는 패션 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강연을 들었고,  같이 점심을 먹은  오후에는  여성 기업가를 초청해 그녀의 인생 여정에 대한 얘기와 바캉스가 끝나고 돌아온 일터에서 동기 부여하는 법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지루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강연 모두 흡입력이 있었고 꽤나 재밌었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강연의 분위기 그 자체였다. 뭐랄까, 여름 내내 신나게 아 놓고(?) (우리 회사는 7,8월에 각자 3-4씩 쉰다) 이제 일해야 하니까 동기부여를 해야 한다고 하는  너무 프랑스 같고  바이브가 새삼  너무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바캉스 만세!

직접 프랑스에서 회사를 다녀보기 전까지는 바캉스에 대한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어떻게 각자 3주씩이나 휴가를 가는 게 가능하지? 그동안 일은 누가 하고? 그러고도 회사가 돌아가나? 등등. 지극히 한국인스러운 답변들. 여름을 지나오며 풀린 이 의문의 답은 단 하나. 어차피 아무도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업무 관련한 모든 일상이 잠깐 멈춘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주로 하는 일 중 하나는 잡지사 촬영을 위한 옷을 대행사로 보내주는 것인데 각자의 세부 일정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잡지 기자도 쉬고 대행사도 쉬기 때문에 여름 동안 협찬을 요청받을 일 자체가 없었다. 즉, 시스템 안의 모두가 쉬기 때문에 자연스레 내가 해야 할 일도 사라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세일즈 부서에서 신제품을 받아 대행사 및 각국 지사로 보내는 일인데 세일즈 부서도 일을 쉬기 때문에 신제품이 들어오지 않는다. 들어오는 게 없으니 나갈 것도 없다. 일을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이처럼 물고 물리는 관계에서는 모두가 일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모두가 각자의 바캉스를 갖는 상황이라 남의 바캉스에 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볼 필요는 더더욱 없고. 그저 서로 각자의 행선지를 묻고 즐거운 바캉스 보내라는 인사만 전할뿐. 여름 내내 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사는 '아름다운 여름 보내'라는 뜻의 BEL ETE다. 

억울한 게 있다면, 이렇게 임직원 모두에게(슬프게도 인턴은 제외지만) 3주간의 방학을 주어도 전혀 업무상의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사실은 한국에서도 우리 모두 바캉스를 누려도 됐던 게 아닐까? 앞으로도 딱히 일어날 일 같진 않지만 한국에서도 그 정도 여름휴가를 쓰는 게 가능해진다면 망설이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일할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발걸음이 안 떨어질 이유는 여름휴가일 것이다. 안 그래도 최근에 팀원한테 여기 첫 정규직 얻으면 법정 휴가 얼마 주냐고 물어봤는데 1년에 5주라고 했다. 그럼 여름휴가 3주에, 크리스마스랑 연말 해서 1주일 쓰고, 평소에 나눠서 1주일 더 쓰고… 그리고 내가 알기론 Cadre(고용 형태 중 하나)의 경우 1주일간 35시간 기준 초과 근무한 시간에 대해서는 RTT라고 해서 초과 근무한 만큼 평일에 더 적게 근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월요일에 야근하면, 목요일에 그만큼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것. 아니면 그 시간들을 모아 추가로 휴가 일수를 얻을 수 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9월 중순이 되니 진짜 모든 일이 몰아닥치고 있어서 하루하루가 쉽진 않지만(무려 9월 말에 한 해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패션쇼가 있다), 백 번 생각해도 놀 때는 놀고 바쁠 땐 바쁜 게 맞는 것 같다. 게다가 쉰 것도 아니고 안 쉰 것도 아닌 어중이떠중이 휴가도 아니고 약 3주에서 한 달간 업무에 대한 생각에서 멀어질 수 있다면, 그래서 머리를 충분히 비우고 다시 회사로 복귀할 수 있다면, 다시 업무가 시작됐을 때 스트레스로 터져버릴 일이 없다. 한껏 비워낸 그 자리에 다시 일상이 들어서는 느낌일 뿐. 


프랑스에서 개학/개강을 뜻하는 단어는 La rentrée 다. 영어로는 back to school로 자주 번역된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이 표현이 직장인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 업무 복귀?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주로 한탄하듯 말하는 직장에도 방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이곳에서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프랑스인들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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