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는 어른들에게도 방학과 개학이 있다.
9월 2일 금요일에는 회사 마케팅 팀 팀빌딩이 있었다. 커뮤니케이션 팀에 속해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사 대신 프랑스 패션 학교로 출근했고, 출근 시간도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늦은 데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곳이라 (평소 통근 시간 지하철+도보 40분) 마음도 발걸음도 가벼웠다. 팀빌딩은 건물 강당에서 진행됐는데 오전에는 패션 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강연을 들었고, 다 같이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는 한 여성 기업가를 초청해 그녀의 인생 여정에 대한 얘기와 바캉스가 끝나고 돌아온 일터에서 동기 부여하는 법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지루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두 강연 모두 흡입력이 있었고 꽤나 재밌었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강연의 분위기 그 자체였다. 뭐랄까, 여름 내내 신나게 놀아 놓고(?) (우리 회사는 7,8월에 각자 3-4주씩 쉰다) 이제 일해야 하니까 동기부여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게 너무 프랑스 같고 그 바이브가 새삼 또 너무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바캉스 만세!
직접 프랑스에서 회사를 다녀보기 전까지는 바캉스에 대한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어떻게 각자 3주씩이나 휴가를 가는 게 가능하지? 그동안 일은 누가 하고? 그러고도 회사가 돌아가나? 등등. 지극히 한국인스러운 답변들. 여름을 지나오며 풀린 이 의문의 답은 단 하나. 어차피 아무도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업무 관련한 모든 일상이 잠깐 멈춘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주로 하는 일 중 하나는 잡지사 촬영을 위한 옷을 대행사로 보내주는 것인데 각자의 세부 일정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잡지 기자도 쉬고 대행사도 쉬기 때문에 여름 동안 협찬을 요청받을 일 자체가 없었다. 즉, 시스템 안의 모두가 쉬기 때문에 자연스레 내가 해야 할 일도 사라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세일즈 부서에서 신제품을 받아 대행사 및 각국 지사로 보내는 일인데 세일즈 부서도 일을 쉬기 때문에 신제품이 들어오지 않는다. 들어오는 게 없으니 나갈 것도 없다. 일을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이처럼 물고 물리는 관계에서는 모두가 일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모두가 각자의 바캉스를 갖는 상황이라 남의 바캉스에 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볼 필요는 더더욱 없고. 그저 서로 각자의 행선지를 묻고 즐거운 바캉스 보내라는 인사만 전할뿐. 여름 내내 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사는 '아름다운 여름 보내'라는 뜻의 BEL ETE다.
억울한 게 있다면, 이렇게 임직원 모두에게(슬프게도 인턴은 제외지만) 3주간의 방학을 주어도 전혀 업무상의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사실은 한국에서도 우리 모두 바캉스를 누려도 됐던 게 아닐까? 앞으로도 딱히 일어날 일 같진 않지만 한국에서도 그 정도 여름휴가를 쓰는 게 가능해진다면 망설이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일할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발걸음이 안 떨어질 이유는 여름휴가일 것이다. 안 그래도 최근에 팀원한테 여기 첫 정규직 얻으면 법정 휴가 얼마 주냐고 물어봤는데 1년에 5주라고 했다. 그럼 여름휴가 3주에, 크리스마스랑 연말 해서 1주일 쓰고, 평소에 나눠서 1주일 더 쓰고… 그리고 내가 알기론 Cadre(고용 형태 중 하나)의 경우 1주일간 35시간 기준 초과 근무한 시간에 대해서는 RTT라고 해서 초과 근무한 만큼 평일에 더 적게 근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월요일에 야근하면, 목요일에 그만큼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것. 아니면 그 시간들을 모아 추가로 휴가 일수를 얻을 수 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9월 중순이 되니 진짜 모든 일이 몰아닥치고 있어서 하루하루가 쉽진 않지만(무려 9월 말에 한 해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패션쇼가 있다), 백 번 생각해도 놀 때는 놀고 바쁠 땐 바쁜 게 맞는 것 같다. 게다가 쉰 것도 아니고 안 쉰 것도 아닌 어중이떠중이 휴가도 아니고 약 3주에서 한 달간 업무에 대한 생각에서 멀어질 수 있다면, 그래서 머리를 충분히 비우고 다시 회사로 복귀할 수 있다면, 다시 업무가 시작됐을 때 스트레스로 터져버릴 일이 없다. 한껏 비워낸 그 자리에 다시 일상이 들어서는 느낌일 뿐.
프랑스에서 개학/개강을 뜻하는 단어는 La rentrée 다. 영어로는 back to school로 자주 번역된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이 표현이 직장인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 업무 복귀?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주로 한탄하듯 말하는 직장에도 방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이곳에서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프랑스인들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