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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파랑 Oct 13. 2022

27. 파리 패션 위크 체험기

체험 삶의 현장….


바캉스가 끝나고 우리에게 남은 건, 패션 업계에서는 1년의 꽃으로 불리는 패션쇼다. 올해의 디데이는 9월 27일. 9월 말 진행되는 파리 패션위크는 여름의 열기와 들뜸이 가라앉은 자리를 대신했다. 코로나가 휩쓸고 간 근 3년 중에 가장 많은 셀러브리티들이파리를 방문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나라 연예인들의 파리행 출국 기사가 인터넷 뉴스를 휩쓸었다. 바야흐로 패션 축제의 계절이었다.


패션위크 준비는 쇼에 초대할 인플루언서들에게 작은 선물과 초대장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속옷 한 세트와 가운 하나, 화장품 몇 개, 손으로 하나하나 쓴 메시지가 담긴 박스를 보냈다. 말만 들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약 3일 동안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가 된 듯했다. 브랜드 로고가 달린 스티커를 박스에 한 땀 한 땀 붙여야 했고 초대장에 손글씨와 주소를 써야 했고 준비한 속옷과 화장품을 같은 수량으로 담아야 했다. 그리고 쇼 전날에는 캘리그래피로 하나하나 초대된 600명의 이름을 새긴 봉투를 배정된 자리 구역에 따라 나눠야 했다. 뭔가 알아서 처리되었을 것만 같던 일 하나하나에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갔다. 모든 일을 뾰로롱 요술봉으로 쉽게 가능하게 해주는 요정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그리고 대망의 당일. 오후 세 시 경에 현장에 도착했다. 올해는 Archives Nationales de Paris라는 박물관의 정원에서 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쇼장 입구에서 초대되어 오는 사람들이 도착하는 족족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그 사람의 이름이 적힌 출입 배지를 나눠주는 일이었다. 초대된 사람들은 상당히 다양했다. 일단 우리 회사 사람들, 모델들, 헤어 메이크업 팀, F&B 팀, 매거진, TV 등 각종 매체의 취재 팀, 협찬 브랜드에서 온 사람들 등등. 포토월에 서야 하는 인플루언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 그러니까 약 6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나와 두 명의 팀원들 담당이었다. 이런 일을 할 때는 꼭 사람들이 몰리는 타이밍이 정해져 있어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을 붙잡고 일을 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같이 일한 친구는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나는 배지 더미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찾느라 정말 화장실을 갈 시간도 없이 서서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늘 그렇듯이 변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신청을 했는데 명단에 이름이 없는 사람, 명단에 이름이 있는데 배지가 없는 사람, 명단엔 없는데 배지는 있는 사람 등. 이런 류의 교통 체증이 있을 때마다 저 세상으로 떠나려고 하는 정신을 붙잡았다. 게다가 이런저런 문의는 어찌나 많은지 솔직히 정신 차리지 않으면 프랑스어 하나도 이해 못 할 것 같아서 머리에 힘을 꽉 주었다. 나 같은 이방인이 이렇게 여기 프런트에서 일을 하는 게 맞냐는 말이야. 백오피스 내놔...


쇼는 아홉 시에 시작했다. 대략 여섯 시간 동안 일을 한 후 쇼가 시작하기 이십 분 전쯤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별 일 없이 일을 마쳤다는 안도감이 온몸을 기분 좋게 휘감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쇼장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고 런웨이에 조명이 들어오고 음악이 재생되는 순간, 쇼는 시작됐다. 모델들은 큰 디귿 자로 된 런웨이를 걸었고 란제리 브랜드의 쇼는 자연스레 빅토리아 시크릿을 떠오르게 했다. 라이브 밴드 연주와 함께 초청된 아티스트들이 노래를 불렀고 다섯 개의 서로 다른 테마에 맞춰 쇼가 진행됐다. 지난 3주간 모두의 피땀 눈물이 담긴 결과물이 20분 안에 모두 끝나는 경험은 꽤나 묘했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렸다고 할까. 물론 앞으로 수도 없이 우려먹을 생중계 영상이 남았지만.

쇼가 끝난 후에는 미리 초청한 푸드트럭들에서 샴페인, 와인, 위스키 등의 술과 다양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저녁도 못 먹고 물 몇 모금만 겨우 마시며 하루 종일 일한 나는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쑤셔 넣었다. 화려한 패션피플들 사이 구석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서 급하게. 맛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냥 배를 채워야겠다는 생각뿐. 그 순간 쇼가 끝난 자리에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졌다. 하루 종일 비가 오다 말다 했는데 그래도 쇼를 하는 20분 동안 비가 안온 건 정말 다행이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런웨이에서 걸어야 하는 모델들이 넘어지기라도 했으면 어떡해. 아무튼 소나기가 어찌나 시원하게 내리는지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쇼가 끝나고 뒷정리가 대충 될 때쯤, 그러니까 한 열한 시쯤 집에 가려고 쇼장을 나왔다. 택시가 진짜 진짜 안 잡혀서 20분 동안 도로에 서 있었다. 안 그래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워서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어질 즈음 퇴근하던 두 명의 매니저를 만났고 다행히 그녀들이 회사가 돈을 내준 선불 택시를 불러줬다. 비록 20분쯤 더 기다려야 하긴 했지만 편한 택시 뒷좌석에 몸을 던져 넣고 나니까 비로소 하루가 무사히 끝난 느낌이 들었다. 패션위크의 화려함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자리하는지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두 번은 하기 싫... 지만 또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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