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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파랑 Nov 18. 2022

28. 너 파리지엔 다 됐다

슬슬 이 도시가 지겹다고 생각한 순간에 듣는 말


나는 파리를 사랑했다. 사랑이 흘러넘쳐서 쉽게 티가 났다. 오죽 사랑했으면 20대에 파리를 여행으로만 네 번씩이나 오고도 모자라 서른에 정착할 결심을 했을까. 물론 처음부터 정착할 생각으로 온 건 아니지만, 도착 후 두 번째 계절을 맞이했을 땐 이미 이곳에 더 오래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게 잘 살기 위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돌아와야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야 조금 삶이 궤도에 들어왔고 어느 정도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너무 애쓸 필요는 없겠구나 하는 안도감.  

근 4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서야 삶이 안정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이유는 내년 1월부터 내가 그렇게 원하던 큰 규모의 럭셔리 그룹에 속한 한 메종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기 때문이다. 파리에 처음 도착했던 2019년 1월 이후, 무려 다섯 번째 1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꿈에 가까워진 느낌을 받게 됐다. 물론 아직 정규직도 따야 하고 취업 비자 문제도 있고 어쩌고 저쩌고… 남아있는 과제들이 많지만 마침 석사가 끝나는 시기에 내가 원하는 산업, 좋아할 수 있을 브랜드, 그리고 잘 해낼 자신이 있는 포지션까지 모든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일을 하게 됐다는 건 꽤 큰 의미다. 게다가 단 하나의 인턴을 구하기 위해 열 개 이상의 면접을 봐야 했던 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처음 인사팀 면접을 봤던 브랜드에서 두, 세 번째 면접까지 물 흐르듯 통과했고 최종 오퍼를 받기까지 3주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구직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아 스무스하게 인턴을 구할 수 있었다. 벌써 한 달도 넘은 이야기지만 아직도 그날의 파도가 생생하다. 드디어 내게 의미가 있는 뭔가를 이뤄냈다는 벅참과 앞으로의 도전에 대한 설렘 등이 뒤섞이며 그날 하루 종일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이제 내게 더 큰 의미를 주는 건 더 이상 파리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내가 이곳에서 이뤄낸 성취들이다.

근래의 일상을 들여다보자. 평일에는 일 - 운동 - 집. 주말에는 운동- 카페(그마저도 드묾) - 친구 만나기. 그마저도 주말 이틀 다 외출하는 건 불가능하고 하루는 무조건 집에서 쉬어야 한다. 그리고 빨래, 청소 등 밀린 집안일까지 해치우고 나면 주말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예전에는 파리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지만 지금은 쉬는 날 어디 멀리 나가기도 귀찮고 사실 어딜 가도 심드렁하다. 물론 어떤 순간은 여전히 예쁘고 계절의 변화에 맞춰 변하는 공기의 흐름은 꽤나 설레지만 그런 걸 알면서도 만끽하러 나갈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때론 내가 파리에 살고 있는지 조차도 헷갈릴 지경이다. 그리고 이런 게 고민처럼 느껴질 때는 역시 해외 생활이 너무 버거울 때, ‘사실 직장인의 삶은 여기나 저기, 서울이나 파리나 그게 그거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무래도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이라도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다. 파리에 사는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하지?

내가 친구들을 만나 이런 푸념을 늘어놓을 때마다 그들의 반응은 늘 한결같다. ‘너 말하는 거 완전 파리지엔 같다’ 거나 ‘이제 파리지엔 다 됐네!’ 라거나 ‘진정한 파리지엔이 됐다는 거 아닐까?’ 하는 반응들. 맞다. 그랬다. 내게 파리는 이제 그냥 삶의 공간이 된 거다, 이제야. 주말만 되면 파리를 벗어날 계획을 세운다거나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도시에 살면서도 늘 불만 가득 찬 얼굴로 투덜투덜 대는 여타 파리지엔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한 사람. 관광객의 들뜬 얼굴들 사이를 심드렁한 얼굴로 휘젓고 다니는 파리지엔.

진짜 웃기는 건 이제 그런 이유로 이 도시를 떠나기 힘들단 사실이다. 점점 이곳에서 내 자리를 찾아가고 있고 궁극에는 딱 맞는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삶의 균형을 잘 맞춰가며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나도 그 후의 내가 궁금하다, 지금의 확신은 미래의 나를 배신하지 않을지.) 나는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파리지엔들의 자유로움을 좋아하고 일이 삶을 잠식하게 두지 않는 것, 대신 바캉스는 절대 지켜야 할 만큼 중요하고 때론 사랑이 전부인 그런 삶의 태도를 좋아한다. 미래에 얼마나 돈을 모을 수 있을지보다 현재의 행복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자세 조차도. 그래서 이제는 단지 내가 꿈꾸던 도시에 있다는 사실보다 아무래도 그런 가치들이 내게 더 중요해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가치들이 눈에 보이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이 작은 도시가 지겹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나는 이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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