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의 제목을 <파리지엔, 인생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지은 것을 한동안 후회했다. 지난 몇 달간 하루하루가 버거웠기 때문에, 도저히 삶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리 기획했던 아이템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썩어갔다. 하고 싶은 말이 생겨야 쓸 텐데, 뱉을 말 대신 삼킬 말밖에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이 매번 나를 좌절시켰다. 도무지 인생을 사랑할 여력이 없었다.
나는 말이 삼켜지는 순간의 공기를 잘 알았다. 나도 삼키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기하는 마음. 작은 포기들은 소량의 독처럼 켜켜이 쌓여 사랑을 죽인다.
- 김화진, 사랑의 신
충분조건 A, B, C, D... 만 만족하면 대충 원하는 인생을 출력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과거의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고,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학교에서 석사를 하고, 관련 분야에서 인턴십을 하면 당연히 원하는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안정감 있는 삶을 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대부분의 성취들이 그런 식으로 일어났으니까. 지난 몇 달은 인생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허비했다.
무수한 시도들이 실패하고 좌절하는 와중에 물론 즐거운 날도, 걱정 없는 날도, 결국엔 다 잘 될 거 같은 희망으로 가득한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쓰고 싶은 사람이었다는 것조차 잊는 날들이 많았다. 물론 불안했다, 내가 알던 내가 내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게. (생각보다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을 수도?) 사실은 내가 글을 쓰지 않아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고(그건 당연하지만) 세상은 당연하게 돌아가며 오히려 쓰지 않는 게 개인적인 삶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게 두려웠다. 그렇게 쓰는 이유를 영영 잃어버릴까 봐, 무엇보다 다시는 쓰지 않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러니까 내가 마침내, 달리기에 대해 쓰고 싶다 생각했을 때 그건 하나의 사건이었다. 쓸 마음을 다시 들게 한 사건. 때는 영원을 꿈꾸게 하는 축제 같은 여름이 끝나고 공허와 쓸쓸함만이 남은 8월의 끝자락 즈음이었다. 모두가 바캉스를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시기, 익숙한 계절성 우울에 잠기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로 다시 밖에 나가 뛰기 시작했다. 달리기 자체는 크게 낯설지 않았다. 파리에 살기 시작할 때부터, 지난 5년 간 수도 없이 뛰었고 특히 너무 외로운 마음이 들 때면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턱 끝까지 숨이 찰 정도로 뛰곤 했으니. 붉게 타오르는 노을 속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 속으로, 때론 공기 중에 눈물을 흩뿌리면서. 그리고 매년 여름의 초입, 파리에서 진행되는 아디다스 10km 마라톤도 두 번 정도 참가했었다. 기록은 늘 비슷했고 더 잘 뛰고 싶은 욕심도 없었으며 그저 완주에 의미를 두는 정도의 러너였지만, 마음 한편에 항상 한 번쯤은 10km를 한 시간 이내에 들어와 보고 싶다는 작은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1km에 6분. 좀체 줄어들 생각을 안 하던 러닝 기록이 지난 몇 달 웨이트를 열심히 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5km도 겨우 달리던 예전과 다르게 5km를 지나도 더 뛸 수 있을 것 같았고, 이대로 멈추기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6km를 뛰기 시작했고 점차 1km에 5분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하게 컨디션도 좋았고 날씨도 환상이던 9월의 어느 일요일, 3-4km 정도 뛰었을 때 러너스 하이라고 불리는 흥분 상태가 찾아왔고 어쩐지 이대로 영원히 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6km, 7km를 뛰다 보니 이대로 괜찮은 건가 겁도 났지만 그쯤 되니 이왕 이렇게 된 거 10km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날이었다. 숨도 가쁘지 않았고 다리도 많이 아프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10km를 다 뛰고 기록 어플에 찍힌 55분 51초를 확인했을 때의 기분이란. 한 번쯤 갖고 싶던 기록을 5년 만에 기어코 이뤄낸 것이다. 성취감에 온몸이 짜릿했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기분이 오랜만이라 마음이 요동쳤다. 아, 달리기의 맛.
달리기를 할 때면 일상의 고민들은 훌훌 저 멀리 날아간다. 몸이 고되니 생각을 할 겨를이 없고 그저 왼발과 오른발의 반복적인 움직임, 가빠졌다가 안정을 되찾길 반복하는 호흡, 무릎과 허벅지, 엉덩이에 전해지는 느낌 같은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뛰는 동안에는 카카오톡을 볼 일도, 유튜브 쇼츠와 인스타그램 릴스를 영원히 반복할 일도, 자극적인 뉴스나 가십을 찾아다닐 일도 없다. 헬스장에서 반복적인 웨이트를 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바깥의 햇살이나 바람, 혹은 계절의 공기나 냄새 때문일까? 유난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때론 달리기를 하다 비가 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몇 배는 더 행복하다. 변덕스러운 파리 날씨 특성상 그러다가 해가 빼꼼 나오고 무지개가 뜨면 진짜 온 세상이 내 거 같다. 살면서 그런 느낌을 몇 번이나 받을까 싶은데 달리기를 할 때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맨 몸인 상태면서도, 그런 느낌을 자주 받는다.
무엇보다 근 몇 달간 파리에 눈에 띌 정도로 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점심시간에도, 주말에도 무리 지어 뛰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본다. 그럼 한 번씩 속으로 응원을 보낸다. 그 마음이 그 마음이겠지 하면서. 달리기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니까. 그래서 간절히 바라던 기회들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때, 내가 들인 노력이 한 번씩 날 배신한다고 느낄 때면, 나는 뛴다. 달리기를 믿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