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침내 꿈에서 깼다.
퇴사 이후의 시간은 확실히 많은 것을 바꾸고 있다. 네다섯달 정도 지나고 나니 단순히 생활패턴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가치관,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던 삶을 억지로 멈추고 나니, 수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바로 '꿈'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꿈 신봉자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꿈이 많았다.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고, 무한한 상상의 나래 속에서 나는 누구나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꿈꾸는 대로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외교관, 시인, 소설가, 검사, 통역가, PD, 에디터... 수없이 많은 꿈이 생겼다가 사라졌으며 개 중 남은 꿈들은 점차 구체적인 모양새를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치 앞이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도 미련스럽게 꿈을 놓지 못했던 나는 결국에는 꿈을 이뤘다. 수없이 떨어졌던 눈물 방울과 끝도 없이 좌절했던 시간들을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정도로 포장할 수 있게 되었다.
꿈.
그렇게 간절하게 바래왔던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그 기쁨은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한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한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한 사람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고.
꿈의 지속성.
그리고 꿈꾸던 일이라는 것은 나를 들뜨게 하는 동시에 나를 낭떠러지로 조금씩 밀어내는 존재였다. 나는 즐거우면서 고통스러웠다. 그 즐거움은 자꾸 고통을 잊게 만들었지만, 그렇게 곪아왔던 시간들은 결국 나를 병들게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잘하고 싶은 욕심은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했고 우습게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 던진 채찍에 맞아서 아팠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이 일을 덜 좋아했으면 모든 게 조금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그게 안됐다.
꿈의 폐기.
그래서 놓았다. 오래도록 나의 꿈이었던, 나의 직장을. 사실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을, 이렇게 그냥 놓아버린다고? 두려웠다. 나중에 후회를 할까봐, 또 다시 일을 하고 싶어지면 그 당시의 내가 너무 미련하게 느껴질까봐.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게 약점이 되어 스스로를 잃어가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진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미련은 없었다. 말 그대로, 하얗게 불태웠다고 생각했다. 꿈을 위해 달려왔던 시간을, 그리고 나의 청춘을. 이것 이상 더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거란 사실이 나를 위로했다.
꿈의 확장성.
지금은 꿈을 꾸는 대신 그냥 주어진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살고 있다. 크게 힘든 일도, 그렇다고 크게 뿌듯한 일도 없지만 좀 더 행복하다. 예전보다 책도 많이 읽고, 일기도 꾸준히 쓰고, 운동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친구들도 자주 만난다. 나의 하루는 조금 더 건강하고 풍성해졌다. 예전처럼 벌컥 화를 낼 일도 없고, 쓸데없이 불안할 일도 없으며, 늘 세찬 파도를 마주하던 감정은 어떠한 기복도 없이 잔잔히 흘러간다. 지금은 소소한 일상이 주는 행복이 나를 지배하고, 나는 조금 더 온전한 자아를 마주하게 됐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가 좋아하는 건 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하나하나 처음부터 나를 다시 쌓아가는 느낌이다. 그렇게 살다보니 종래에는 '정말 꿈이 필요할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꿈'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여기서의 '꿈'이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되고 싶은 사람과 같은 의미였다. 일이 주는 성취감이 다른 어떤 것보다 인생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꿈이 없는 사람들을 동정하고, 또 '그런 삶은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하는 비뚤어진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고군분투했던 이전의 삶을 다 지나고, 또 그와 반대되는 여유로운 삶을 즐기다보니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인생에는 일 말고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 많다는 걸. 그리고 꿈이 없다고 해서 절대 의미 없는 삶이 아니라는 것도. 모두가 꿈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고, 인생에 꼭 무언가 거창한 목표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온전한 나로 사는 하루하루가 모여 나의 인생을 만들 뿐. 우리는 그저 그 안에서 기쁨과 슬픔, 안정과 불안이 뒤엉기는, 그러니까 인생이 필연적으로 선사하는 온갖 감정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