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주말을 보내는 법

그리고 사랑, 사랑, 사랑.

by 봄의파랑

당신이 파리에 산다는 건, 꽤나 자주 흐린 하늘과 산발적으로 내리는 비를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지난했던 겨울을 거쳐왔다면 해에 대한 집착이 꽤나 처절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금요일에 있을 시험이 끝나고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될 이번 주말 내내 2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구름 한 점 없이 해가 뜰 거라는 예보를 보고 나서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히 주말을 기다려왔다.

햇살이 좋았던 센 강변

토요일 오전에는 인터넷 설치 기사와의 약속이 잡혀있었다. 촘촘한 어학원 수업 시간표로 인해 평일이 아닌 토요일로 약속을 잡아야 했기 때문에 와이파이 박스가 도착하고 나서도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사실 내가 쓰고 있는 프리 모바일의 한 달 와이파이 사용 가능량이 100G에 육박하고 집에서 공부하느라 컴퓨터를 장시간 쓸 일도 거의 없기 때문에 그동안 집에 와이파이가 없다는 것에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1시간 정도 후 인터넷이 깔리고 나니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뭔가 묘한 정서적 안정감이 든달까.

파리 와서 본 수많은 빵집 중에서도 손에 꼽게 예쁜 외관

설치 기사가 다녀간 후 한 시간은 평일 내내 시험을 핑계로 폭격을 맞은 집을 청소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집안일은 하면 티가 안 나지만 안 하면 티가 난다는 말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널브러진 설거지 더미부터 해결하고 걸레질을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하고 화장실 청소까지 말끔히 끝내고 나서야 한숨 돌리고 외출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오늘의 목적은 볕을 마음껏 쬐기! 수업 시간에 대만인 언니가 추천해준 'Jardin des Plantes'가 오늘의 첫 목적지였다. 직역하면 대충 식물들의 정원이란 뜻이 되는데 이곳에 있는 엄청 큰 벚꽃나무를 보는 게 이곳을 가는 가장 큰 이유였다. 어학원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금방 간다길래 일단 집에서 나와 어학원으로 향했다. 날씨가 온화하니 자연히 마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들떴다. 참고로 파리는 시위가 있거나 큰 행사가 있으면 버스가 운행을 하지 않는데, 특히 주말에는 버스가 운행을 안 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 한다고 해도 배차 간격이 거의 30분-1시간에 육박하기도 하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어학원까지는 무사히 갔지만, 다음에 타야 할 버스는 오늘 운행을 하지 않았고 결국 목적지까지 그냥 30분 정도 걷기로 했다. 날씨도 좋은데, 뭐. 그렇게 거의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의 들뜬상태로 사실상 거의 초행길인 파리의 거리를 걸었다. 이 방향까지는 올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거리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Jardin des Plantes에서 만난 꽃나무

그렇게 해서 도착한 'Jardin des Plantes'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환하게 내리쬐는 볕 아래 마주한 사람들의 표정이 다 행복을 머금고 있어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인파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잘 다듬어진 잔디밭을 따라 원색의 꽃들이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리듬을 맡긴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봄이 정말 코 앞에 와있다는 게 실감났다. 눈앞에 펼쳐진 봄에 마음을 온통 빼앗겨 산책을 하다가 마침내 '그' 벚꽃 나무를 발견했다. 대단히 큰 규모의 벚꽃 나무 한 그루 아래에는 이미 많은 관광객이 꽃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거의 줄 서서 찍고 빠지고, 찍고 빠져야 될 수준이었는데 뭔가 벚꽃 때가 되면 사람들로 바글거렸던 서울의 풍경이 생각나서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여의도처럼 벚꽃나무가 촤르륵 늘어서 있는 장관은 아니어도 흐드러지게 꽃이 핀 벚꽃나무를 보니 이곳에 와서 야무지게 봄을 맞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벚꽃나무 말고도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꽃나무를 실컷 볼 수 있었고 지척에 와있는 봄을 품에 가득 끌어안으며 알차게 꽃놀이를 마무리했다.

Jardin des Plantes
황홀할 정도로 예뻤던 Jardin des Plantes의 꽃나무

이 정원을 나와 길만 건너면 바로 센 강이 펼쳐진다. 역시 따뜻해진 봄 날씨를 증명하듯 많은 사람들이 밖에 나와 있었다. 강가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 또 그 분위기에 취해 정처 없이 걸었다. 걷다가 버드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누워서 볕을 쬐다, 또 들고 나온 책을 읽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주위에 온통 친구들과 소풍을 나온 사람들, 책을 읽는 사람들,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사람들, 뛰다가 잠깐 멈춰 쉬는 사람들, 풍경을 보며 음악을 듣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심지어는 동호회였는지 댄스 강좌였는지 모르겠지만 강변에서 살사 댄스를 추는 중년의 커플들도 있었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고, 햇볕은 따뜻하고, 공기는 포근해서 작은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게 완벽했다. 아무쪼록 파리에 살기 정말 좋은 계절이다.

센 강변의 버드나무 아래서 책을 읽었다

사실 원래는 바로 버스를 타고 나의 안식처, 튈르리 정원으로 가서 책을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1)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 그곳까지 걸어서 가려면 한참이 걸린다 2) 주말 오후의 튈르리 공원은 사람으로 북적일 게 분명하고, 고로 앉을 벤치가 없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자, 쿨하게 그곳까지 가기를 포기하고 대충 4구 정도까지 걸어와 센 강변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배가 고팠으므로 강가를 살짝 벗어나 내가 제일 사랑하는 빵집이자 생제르망 근처에 분점이 있는 'La Parisienne'에 가서 샌드위치와 작은 빵, 그리고 커피를 사서 나왔다. 먹을 것을 잔뜩 품에 안은 채 볕이 가장 잘 드는 명당에 자리 잡고 오물오물 빵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센 강변 역시 사람들로 거의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고 있었다. 파리에 여행 왔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곳에서 살다 보니 봄이 올랑 말랑 한 계절에 온전한 햇볕을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까 볕이 좋다 싶으면 다들 집 밖으로 나오기 바쁜 게 이해가 갔다. 햇빛이 수면 위로 쏟아지며 강물이 반짝이는 순간이 너무 좋아서 하염없이 그것을 쳐다보다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일상 소음에 가만히 귀 기울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이런 꿈같은 순간이 오면 내가 정말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묘한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극대화된 행복의 증거다. 행복하다는 게 실감이 잘 안 나서 그런다. 이렇게까지 행복하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나는 모든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라 남들보다 쉽게 행복해하고 쉽게 절망하는 등 감정의 진폭이 심한데 이곳에 와서는 행복할 일이 많다 보니까 자잘한 화나 절망이 금세 잊힌다는 게 좋다. 아무튼 내가 그토록 꿈꿔왔던 파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순식간에 그 모든 걸 긍정할 수 있다는 게, 그래서 삶을 사랑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그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는 게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준다.

사람들로 북적였던 센 강변

센 강을 따라 산책을 하면서 시내로 향했는데 정말 파리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걷다가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을 우연히 만났다. 사실 나는 기분에 취해 몰랐는데 그 친구가 엄청 깜짝 놀라며 인사를 해서 알아봤다. 옆에는 역시 같은 반인 남자애가 있었다. 둘이 썸 타는 기류이긴 했는데 주말 데이트도 같이 할 정도로 발전한 줄은 몰라서 왠지 나까지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봄이다. 봄. 사랑의 계절. 그리고 우리는 사랑이 펼쳐지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시인 파리에 살고 있잖아.

아무쪼록 테라스의 계절

아무튼 아직 토요일은 끝나지 않았으니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소비를 줄이려고는 하지만, 봄에 입을 원피스가 너무 갖고 싶었기 때문에 앤아더스토리즈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파리에 있는 세 개의 앤아더는 모두 일상생활의 동선과는 맞지 않는 강의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작정하고 찾아가야 한다. 내가 가장 애정 하는 브랜드 중 하나인 만큼 파리에 온 다음부터 한번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짐이 많아서, 귀찮아서, 멀어서 등등의 핑계로 늘 포기했었고 적당한 날이 오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들뜸의 정도가 최고를 찍은 오늘이 바로 기다리던 그날이었다. 거리낄 게 없었다. 정작 필요한 건 맨날 신는 운동화 말고 평소에 신을 만한 로퍼였는데 로퍼는 보지도 않고 빈티지한 분위기의 원피스만 실컷 입어보았다. 예쁘기도 예쁜데 낭만적인 감성이 파리와도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에 개 중 두 개를 고르고 골라 별 고민 없이 샀다. 아니, 정말 사랑을 불러올 것 같은 원피스여서 그랬어. 이해하지?

해가 천천히 내려앉은 센 강과 멀리 보이는 에펠탑

이제 진짜 집에 가려고 나왔는데 집에 가는 버스를 타러 가다 보니 또 센 강이었고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불타오를 것 같은 하늘을 앞에 두고 차마 발걸음이 안 떨어져서 강가에 기대 하염없이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서있는 곳은 연인들의 다리로 유명한 그 퐁네프였다. 당신이 낭만의 신봉자고 무심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멈춰 서게 되는 곳이 퐁네프 다리인 낭만의 도시 파리에 산다면, 시도 때도 없이 당신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사랑의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그 광경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그 무한한 낭만의 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허우적댔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득 차오르는 사랑의 감정이 약간 무섭기도 했는데 그래도 마음 가는 대로 운명을 맡겨보기로 했다. 파리니까,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하는 건 이 도시니까 이미 나의 의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돼버린 걸 어쩌겠어. 이윽고 퐁네프 다리에 불이 켜졌고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으며 멀리 보이는 에펠탑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어이 매 정각 반짝이는 에펠탑을 보고 나서야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퐁네프 다리

이토록 완벽했던 주말에 대해 써야겠다고 시작한 글인데 마음 가는 대로 쓰다 보니 사랑 타령이 되어버린 듯싶지만 오히려 글을 쓰다 보니 이제야 주말 내내 사랑이란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인 것과 무관하게, 나를 사랑하도록 부추기는 건 다름 아닌 이 도시다.

그러니까 맘껏 사랑하자. 겁내지 말고.

From Paris, With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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