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지 않아도 괜찮아

누구보다 성질 급했던 내가 파리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이야기

by 봄의파랑

겨우 세 달이 조금 넘게 파리에서 살고 있을 뿐이지만 가끔은 달라진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최근 그것을 가장 크게 느낀 일이 있었다. 부활절 방학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도서관인 Bibliothèque Saint-Geneviève에 갔을 때였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곳은 퐁피두 미술관의 공공 도서관으로, 그날의 기분이나 상태에 따라 이 두 도서관을 번갈아 방문한다.) 이곳은 오전 중에 가면 여유롭게 입장할 수 있지만 오후 한 시 부근쯤에만 도착해도 도서관 밖으로 입장 줄이 길게 늘어선다. 파리에서 가장 예쁜 도서관으로 꼽힐 만큼 내부가 고풍스럽기도 하고 근처에 대학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도서관 내부 자체도 별로 크지 않아 수용인원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아무튼 그 날도 도착해보니 이미 많은 수의 학생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줄을 서고 나서 그래도 이곳보다는 좀 더 큰 퐁피두 도서관으로 옮겨야 하나, 아니면 카페에서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날따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데 체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줄을 서서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고 주변을 둘러보니 내 뒤에 있던 여학생이 바닥에 주저 앉아 자기가 공부할 책을 주섬주섬 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니 내 가방에 전자책이 들어 있었던 게 생각이 났고 나도 그곳에 서서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쯤에는 흐렸던 하늘이 서서히 걷히고 해가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며 따스한 햇살이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햇살에 또 기분이 좋아져 느긋하게 책을 읽으며 내 차례를 기다릴 수 있었다.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그제야 겨우 도서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느긋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버스를 10분도 못 기다려 먼저 오는 버스를 갈아타가면서 목적지로 향할 정도로 성질이 급한 편이었다. 게다가 매달 마감이 있는 월간지에서 일을 했으니 이런 성향은 더욱 심해졌다.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썼고, 늘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생각해 움직였으며 보통의 일상 역시도 마감 일정에 맞춰 촉박하게 돌아갔다. 다른 사람을 재촉해 가면서 일정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했고, 그랬기 때문에 늘 압박감을 안고 살았다. 하지만 파리에 오고 나서는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내가 발악하고 화내봤자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일들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됐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악명 높은 행정 처리는 은행 계좌를 하나 만드려고 해도, 하물며 집에 와이파이를 설치하는 데도 한달이 걸린다. 상상만 해도 속 터지지 않나? 어제 주문한 것도 오늘 받을 수 있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주말에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2, 30분은 예사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체념하고 살다 보니 반대로 모르고 살던 것도 보이게 됐다. 무엇보다 꼭 그렇게 모든 걸 빨리 빨리 해결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오히려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는 자잘한 화도 많이 줄었다. 모든 일을 '그러려니'하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꼭 그렇게 쫓기듯 살지 않아도 삶은 굴러가더라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덧 내 이름으로 된 직불 카드도 생기고, 집에 와이파이도 빵빵 터지고, 또 무사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더라고. 대신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 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느끼는 것, 그리고 현재의 나 자신에 충실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개인의 일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도 알게 됐다. 물론 '그러니 유럽 사회가 발전이 더디지!' 라는 지적에 대해 반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사회 발전이 개개인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묻는다면, 글쎄요다. 나의 편의를 위해 누군가는 뼈 빠지게 밤낮으로 일을 해야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지나치게 열심히 살면서도 높은 확률로 '원래 인생이 다 그러려니' 하며 자기 위로를 한다. 아무도 우리한테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 인생에 대해 얘기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느긋하게 사는 것, 생각보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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