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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파랑 Feb 08. 2020

어떤 남자애에 대해

소규모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일상이라는 이름의 극장


그 애의 이름은 Charles다. 프랑스어로 읽으면 샤ㄹ에 가깝다. (예전 프랑스어 수업 텍스트를 읽다가 찰스 왕자를 찰스로 발음했더니 선생님이 샤ㄹ로 고쳐준 기억이 나네.) 그 애를 떠올리면 나는 이게 내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인지, 아니면 나만 모르는 소설의 한 장면인지 헷갈린다.

그 애는 내가 일하는 가게 맞은편에 있는 오래된 서점의 직원이다. 그 애의 아버지가 현재 사장이고, 그 전에는 그 애의 할아버지가 운영했고 몇 년후에는 그 애의 서점이 될 것이다. 처음 그 애를 봤을 때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는데, 매번 쓰던 베레모를 벗은 이후로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애는 키가 작고 왜소한 편인데(내 선호와는 거리가 멀다는 뜻) 또 얼굴은 기가 막히게 내 타입이고, 사장이 그 애의 아빠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도 머리가 하얀 그 사장님이 대단한 미중년이라고 생각했으니 역시 유전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달까?

아무튼, 그 애는 그냥 나의 일상을 조금 더 즐겁게 만들어주는 그런 존재였고 오가며 안부 인사를 하는 게 다인 정도였는데, 요즘 들어 급격히 친해지면서 평온하던 나의 일상에 작은 파도들을 일으키고 있다. 그 애와 처음 친해지게 된 건, 내가 출근하는 타이밍에 그 애가 우리 매장에 들어와 내 전타임에 일하는 일본인 친구와 일본인 고객과 셋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같이 껴서 몇 마디를 나누었을 때다. 우리는 일본어와 한국어, 프랑스어 인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후 걔가 몇 번씩이나 ‘안녕’을 마스터하기 위해 매장에 말을 걸러 왔다. 그 애의 안녕이 익숙해질 즈음 우리는 가벼운 대화를 했는데 서로 이름을 묻고, 그가 서점 주인아저씨의 아들인 것도 그때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애는 안녕 뒤에 내 이름을 덧붙여, ‘안녕, 00’이라고 인사를 하고 심지어는 발음도 점점 자연스러워져 이제 그 애와 대화를 할 때 면 순간적으로 한국말로 대답을 할뻔하기도 한다.

그 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매장으로 넘어와 내 충전기를 빌리기도 하고, 자기가 꽂힌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자기가 직접 말아 피는 담배를 보여주거나 그도 아니면 엊그저께 파티를 하다 밤을 새우고 쉬는 날 18시간을 잤다는 등의 일상 얘기를 툭툭 털어놓고 간다. 그 애는 자기 친구들이랑 사는데, 일터에서도 맨날 아빠랑 있는데 같이 살기까진 할 수 없다고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또 저녁 식사는 가족끼리 하는지 엄마한테 오후에 한 번은 꼭 전화해 오늘 저녁을 먹을 건지 아닌지 보고를 한다.

그리고 내가 습관적으로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는 휘파람 불기를 한다는 걸 알아챈 다음에는 휘파람으로 노래를 불어주거나 입으로 내는 이상한 소리들을 들려주러 온다. 그리고 가끔 복도나 서점에서 휘릭! 소리가 들려서 반사적으로 돌아보면 어김없이 장난을 치거나 웃고 있는 그 애다.

그러다 보니 그 애가 잘생겼다는 사실을 자꾸 까먹는데 또 말을 안 하고 서점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여전히 잘생겼고 그래서 내가 환상 속에 가둬놓아 두었던 그 애가 이젠 사라진 것 같아서 슬프지만(ㅋㅋㅋㅋㅋㅋ) 그 애와 마주 보는 공간에서 같이 일을 하고 있으면 어느 학창 시절의 설레는 한 장면으로 돌아간 것 같고 그렇다.

언제까지 여기서 일을 할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내가 그만두고 난 후에도 그 애는 그 오래된 서점에서 계속 일할 것이고, 내 인생이 지속적으로 변할 그 와중에도 그 애는 거기 계속 있을 거라는 사실이 묘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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