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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파랑 Mar 19. 2020

사는 게 갑자기 연극 무대처럼 느껴진다

통행금지 이틀 차 파리지엔 일기

토요일 저녁, 카페에서 한창 작업을 하고 집에 돌아와 떡볶이에 술을 마시다가 자정부터 마트, 약국, 은행, 담배 가게를 제외한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 그래도 이미 학교, 도서관, 미술관 등을 닫는다는 생각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라 눈앞이 캄캄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럼 다음 날 공원이나 산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작 나는 집에 머물렀던 그 일요일에 상업 시설이 문을 닫아 갈 곳을 잃은 파리지엔들이 삼삼오오 공원으로 나들이를 나와 앉아 있을 벤치조차 없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정부에서는 결국 통행 제한을 시행하게 된다. 마크롱 대통령은 공식 담화에서 국민들에게 자기 자신이 바이러스에 걸리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주변의 약한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문제라며 개인이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화요일 정오부터 밖에 나갈 때는 프린트하거나 아님 수기로 작성한 정부의 공식 사유서에 이름, 생년월일, 주소와 함께 외출 사유를 체크해야 한다. 외출 사유에는,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업종의 사람이 일을 가는 것, 건강과 관련된 일로 나가는 것, 정부 허가가 난 상점에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사러 나가는 것, 개를 산책시키거나 (단체가 아닌) 개인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고 이밖에 사유로는 외출이 불가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이다 보니, 산다는 게 거대한 연극 무대처럼 느껴진다. 버려진 유령도시에 홀로 고립되어 일상을 잃은 채 살아가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다. 텅 빈 도로, 사람이 없는 지하철과 버스, 그리고 도시 곳곳을 지키는 경찰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사유서를 확인하는 풍경은 영 현실감이 없다. 그 비참한 농담 같은 연극 속에 나는 온라인으로 프랑스어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전자책에 잔뜩 넣어둔 한국 소설을 읽다가 유튜브를 보며 요가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 같이 사는 룸메가 일을 갔다 귀가할 시간이 된다. 함께 장도 보고 요리도 배우며 정성스레 차린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그래도 좀 기분이 나아지고, 그렇게 하루가 끝날 때쯤엔 일기도 몇 자 끄적이며 내일도 잘 견뎌보자고 다짐하고 잠에 든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눈 앞에 놓인 하루가 너무 길다고 생각하고, 오후에 한 번쯤은 그래도 시간이 가긴 간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밤이 되면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다는 것에 감사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부디 15일이 지난 후에 무언가 나아지길 바라면서. 

소나기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던 Palais Royal 정원.

3년 간의 회사생활을 접고 낯선 도시에서 공부를 하며 예전보다 나만의 시간이 늘어난 후로는 오히려 집에 잘 안 붙어 있게 됐다. 회사를 다닐 때는 마감 후의 휴일이나 일을 하지 않는 주말,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집에서 한도 끝도 없이 늘어져 있곤 했는데, 내 의지로 온 파리에서는 스스로 쓸모없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두려운 마음에 늘 무언가를 하며 부지런하게 지냈다. 학교가 끝나고 도서관에 간다거나, 친구를 만나서 카페를 가고 산책을 한다거나, 주말이면 공원에서 조깅을 하기도 하고, 때때로는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기도 하면서. 특히 최근 몇 달은 학교, 아르바이트, 도서관, 헬스장을 오가며 아침에 집을 나가 저녁에 돌아오는 분주한 일과를 보낸 터라 뭔가 맥이 탁하고 풀려버린 느낌이 든다. 그동안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열심히 사는 데서 적당한 존재 이유를 찾았다면 갑자기 텅 비어버린 일상에서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나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니면 이번 기회에 좀 적당히 힘 빼고도 살아보라고 이런 극한 상황에 놓여 버린 걸까? 아무튼 정말 인생이란, 알 수 없음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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