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째, 여전히 파리에 갇혀있다.
세계가 20제곱미터의 방 한 칸에 갇혔다. 이제야 낯선 도시를 정해진 목적지 없이 방황하는 일이 유일하게 세계와 맞닿을 수 있는 통로였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내는 모습을 보는 것이 큰 위안이 되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외출 제한 이후 그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는 나를 외롭게 만들었으며 점차 병보다 우울에 대한 공포가 훨씬 커졌다. 아니나 다를까, 22일 내내 기분은 상승과 하강 곡선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럭저럭 수월하게 지나가는 날들이 있는가 하면,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대며 존재에 회의를 갖게 되는 날들도 있다. 그래도 하루는 지나가고 삶은 지속되어서 벌써 오늘로 23일째를 맞았다.
며칠 전에는 봄비가 내렸다. 질리게 퍼붓던 겨울비와는 다르게 가랑비에 옷 젖듯 조용히 땅을 적시기에 단지 공기의 상태로만 비가 오는 것을 짐작했다. 눅눅한 공기가 작은 스튜디오를 감쌌고 그 옅은 공기의 변화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져 마치 소나기가 한창 내리는 여름날에 그늘이 큰 나무 아래 우산도 없이 서 있는 듯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냥 보통 때처럼 비가 왔을 뿐인데, 새로운 계절을 몰고 와서 그런지 무심하던 감각세포도 하나하나 깨어나는 듯했다.
이 작은 방 안에서도 세계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요즘은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거의 하루 종일 틀어 놓는다. 특히 아침에 일어나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해가 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저녁을 준비할 때, 하루를 마무리하며 일기를 쓸 때는 꼭 음악이 필요하다. 무드에 맞춰 어울리는 음악을 틀면 내가 상상하는 대로 공간이 그려진다. 햇살이 쏟아지는 거리 한복판이 되기도 하고, 노을이 내려앉는 카페의 테라스가 되기도, 화려한 불빛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되기도 한다. 공기의 흐름을 바꾸는 것은 확실히 음악의 일이고, 그에 더해지는 약간의 상상력은 칙칙한 일상에 다채로운 색을 부여한다.
언어를 넘나들며 책을 읽는 것 또한 새로운 습관이 됐다. 어느 순간부터는 현실을 핑계 대고 책 읽는 것을 게을리하면서 한 권을 끝내는 것도 힘들게 느껴졌는데 요즘에는 남는 게 시간이라 금방금방 읽어낸다. 지루하게 느껴졌던 책들도 지금은 얼마나 재밌게 읽히는지. 읽고 난 후에는 굴러다니는 노트에 인상 깊었던 문장을 정리하고 생각이나 감상도 적는다. 가끔은 책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때처럼 지금도 책만이 유일하게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어준다. 최근에는 미국의 소설가 리사 앨더와 프랑스의 화가 프랑수아즈 질로의 대화로 전개되는 책, <여자들의 사회>를 읽었고 나보다 한두 세대는 앞서 살았던 여자들의 이야기가 내 삶을 마주할 용기를 주기도 했다.
파티셰인 룸메가 요리하는 걸 옆에서 돕다 보니 잔재주도 많이 늘었다. 마늘을 다질 때 도마와 칼이 만나는 소리를 좋아하게 됐다. 그 일정한 리듬이 마음의 평화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러 가지 색감을 가진 재료들의 시각적 조화와 그것들을 씹었을 때의 다양한 식감이 중요하다는 것도. 결국에는 사소한 디테일이 하루를 완성한다. 베이킹을 한 날도 있었다. 핸드믹서로 머랭을 칠 때의 촉감은 또 새로웠다. 베이킹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기본 반죽과 생크림에 머랭을 넣고 저을 때 틈 사이사이에 공기를 주입하는 듯한 오묘한 감각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역시 하루의 마무리는 요가다. 굳어버린 몸을 이리저리 쭉쭉 늘리고 나면 한껏 개운해지고 무거웠던 마음도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그럼 비로소 하루가 끝난 것에 감사하며 잠자리에 든다. 이렇게 천천히 흘러가는 대로 산다. 발버둥 치지 않고 조바심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일상이 멈춰버린 텅 빈 우주 같은 시절에는 아무래도 작은 감각들이 삶의 전부고 내가 하나하나 만들어놓은 소행성들이 천천히 내 주위를 맴돌며 날 지켜줄 거다. 그러니까 결국엔, 다 잘 지나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