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던 Déconfinement을 몇 시간 앞두고.
이제 내일이면 이동제한령이 풀린다. 행정구역 내, 거주지 100km 반경 내에서는 별도의 사유서 없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고, 카페와 레스토랑을 제외한 상업시설이 문을 열고, 작은 규모의 박물관, 도서관 등도 운영을 재개한다. 55일 간 지속되어 온 이동제한령이 풀리기 직전의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마지막 1주일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수업을 듣고 오후에 폭풍 같은 과제를 하고 나면 금방 저녁이 됐고, 매일 밤 쓰던 일기도 이틀이나 건너뛸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갔다. 막연히 상상만 하던 마지막 날을 맞이하는 건 훨씬 더 얼떨떨하다. 오랜 시간 갇혀 있으면서 어느 순간 기대와 희망을 없애는 게 정신 건강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깥 세계를 상상하는 것을 포기하고 덤덤히 그 상태를 받아들이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확실히 감정이 널뛰기를 덜하게 됐다.
어느 날은 헤르만 헤세의 산문집, <밤의 사색>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마주했다.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아침에 즐겁게 일어나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그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이런 당연함을 잃은 사람은 눈에 불을 켜고 필사적으로 진정한 삶의 순간을 찾는다. 반짝 빛나는 짧은 섬광에 행복해하는 순간. 시간 감각을 잃을 뿐 아니라 모든 목표와 의미에 대한 사고가 삭제되는 그런 순간. (…) 어쩌면 이런 순간의 강렬한 빛이 나머지 모든 빛을 가려버리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순간에는 모든 것이 마법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나머지 보통의 삶이 너무 힘들고 구차하고 실패한 듯 보일 수도 있다.
이 문장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읽으면서 아마도 이게 내가 파리에 남게 된 이유이자 55일이 그렇게 영원처럼 느껴졌던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인생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슬픔과 괴로움, 허무와 같은 감정의 구멍들을 저런 번뜩이는 순간들로 채워나가면서 그럭저럭 삶의 균형을 맞춰 왔다는 이야기다. 파리는 내가 삶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쉽게 행복했고, 자주 위로를 받았다. 응어리진 감정들도 훌훌 털고 계속해서 나아가게 해 줬다. 파리는 감정의 진폭이 큰 사람에게 무척이나 관대한 도시다. 마음껏 울고 웃을 수 있도록 도시의 일상적인 아름다움은 다양한 감정의 표출을 도와주고, 속에 쌓인 감정을 그렇게 다 뱉어내고 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곤 했다.
그렇게 순간순간을 충실히 사랑하며 살다가 반경 1km에 갇혀버린 그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통째로 날아가고 존재에 회의감이 깃들었다. 왜 여기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해 괴로운 날들이 지속됐다. 헤세의 말처럼 나머지 보통의 삶이 어느덧 내게 괴로움으로 치환되어 버린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삶이란 건, 내가 평생 좇아왔던 것과는 달리 매 순간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 같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꼭 매 순간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야 할 필요도 없고, 별 거 없이 흘러간다고 해서 초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때로는 인내심을 가져야 할 만큼 권태롭게 흘러가는 게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쩌면 조금 마음을 풀어놓고 편안히 인생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이면, 이동의 자유를 얻는다. 학업이나 일로 미칠 듯이 바빠지는 순간이 오면 지금의 이 시기도 그리워할 때가 올까 상상하면 인간의 간사함에 소름이 돋지만 또 확실히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아니, 하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도무지 그리워할 것 같지 않다. 뭐가 됐든 바쁜 게 낫다. 쓸데없는 생각할 틈 없이 바쁜 게 나아. 아니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인간들에 치여 살다 보면 지금처럼 아무도 못 만나는 삶을 그리워할까? 이 역시도 소름이 돋지만, 지금은 그래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남과 부대끼며 사는 게 인간이 아닌가 싶다. 지지고 볶고 살던 세상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