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다 타이밍이 있다.
한국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했다. 파리의 이동제한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고민만 해왔던 한국행을 드디어 마음먹게 된 것이다. (집에서 할 수 없는) 자가격리 2주도 그렇고, 비행기를 타고 오가는 것도 그렇고, 비용 문제도 있고 여러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도저히 더 이상은 파리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여름의 파리를 좋아한다. 습하지 않은 날씨와 저녁 10시가 되서야 지는 해, 관광객으로 북적이며 들뜬 분위기까지도. 한여름의 파리는 축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을 가고 싶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질 때는 파리 시내를 정처 없이 걷곤 했으며 그러고 나면 계절의 아름다움에 취해 이 도시에 남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향수병이 도졌다 사라지곤 했고, 몇 번 더 반복하면 여름을 지날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부풀었다.
그날도, 그런 희망을 품고 샹드막스에 갔다. 에펠탑이 가장 크고 아름답게 보이는 곳. 일부러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가 질 즈음의 노을을 볼 수 있는 저녁 시간에 공원에 앉아 준비해온 와인을 마셨다.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며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곧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한 달 정도 쉬다 올 거라던 친구는 지금 자기에겐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기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너무 아깝게 느껴진다고. 그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어서 한참을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그녀도 나도 앞으로 2년은 이곳에서 공부를 더 해야 하고, 졸업 후에 일자리를 구할 생각도 있으니 끝도 없이 이어질 레이스를 완주하기 위해선 쉬어가는 시간도 필요한 거다. 우리는 쌀쌀해지는 날씨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고 에펠탑 주위를 서서히 걸었다. 에펠탑은 여전했지만, 그날처럼 감흥이 없던 것도 처음이었고 아마도 그 순간에 나는 비로소 귀국을 결심했던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자주 파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누리고 살 수 있겠지만, 한국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원할 때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예전에는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게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이미 프랑스에서 50여 일간 갇혀 살았던 기억 때문에 쉽사리 자가격리를 마음먹지 못했다. 거기서 2주를 옴짝달싹 못하고 사느니 그냥 이곳에서 돌아다닐 자유를 펑펑 누리며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격리를 하는 동안에도(여기서 이렇게 갇혀 살았는데 거기서 또 갇힐 순 없어!), 프랑스에서 마침내 격리가 해제된 후에도(여기서 이제 펑펑 놀 수 있는데 굳이 또 가서 갇힐 순 없어!) 섣불리 돌아갈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은 신기하게도 한국에서 2주를 방콕 하는 게 (인터넷과 배달음식, 케이블 TV와 넷플릭스가 함께 한다면) 여기서 그냥저냥 2주를 흘려 지내는 것보다 더 재밌어 보인다. 또 어쨌든 그 기간이 지나면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모두를 만날 수 있지 않나. 인간은 역시 어떤 것이든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못할 게 없다. 2주가 지나도 똑같이 이어질 삶보다는, 2주가 지나고 즐거움과 사랑이 가득한 삶이 더 낫잖아. 설레라.
그러니 모든 것은 타이밍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맞는 것들. 어제는 떠나기 전의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생 루이 섬과 센 강을 걸었고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를 고작 5주간 떠나면서도 애틋한 마음이 들어 이상했다. 하지만 파리지앵들이 곧 바캉스를 떠나 텅 비어버릴 빈 도시에 혼자 남아 공허한 마음으로 살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그리고 또 돌아올 내 집이 있어서 다행이고. 한국 가서 푹 쉬고 사람도 만나며 에너지 팍팍 충전하고 돌아와 어느덧 집 같은 파리에서 또 다음 장에 계속될 이야기를 써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