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첫 학기, 프랑스인 사이에서 프랑스어로 발표하고 살아남기 편이랄까
고백하자면, 이 브런치의 제목은 어제 미리 정해놨었다. '내일 조 발표가 끝나고 나면 꼭 이 제목을 붙이고 글을 써야지. 이 조 발표를 위해 내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생각해보면 결과가 어떻든 나는 내가 자랑스러울 거야, 조금 더 힘내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조 발표를 마치고 난 지금, 월요일 밤 열 시 반, 그토록 기다려왔던 그 순간에 나는 그보다 더한 벅참을 느끼고 만다.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우리 학교의 프랑스인과 외국인 학생의 비율은 55:45 정도로, 꽤 높은 외국인 비율을 자랑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수업은 영어와 프랑스어, 두 가지 언어로 제공된다. 특히 석사 프로그램으로 들어온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백이면 백, 영어 수업을 선택한다. 그게 이 경영 필수 과목에 내가 유일한 외국인인 이유다. 내가 프랑스어를 끗발 나게 잘해서라기보다는 무엇이든 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저지르고 뒤늦게 수습하기 바쁜 내 성격상 프랑스어로 된 경영 수업은 한 번쯤 도전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에 같은 과목의 영어수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선택한 거다. 무엇보다 앞으로 프랑스 회사에 취업할 생각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커뮤니티에 잘 섞이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내가 느끼기에 다른 국립대학들에 비해 이곳의 외국인 학생과 프랑스인 학생 사이에는 적잖은 거리가 존재하고(주로 듣는 수업이 영어, 불어로 확연하게 갈리기 때문에), 적어도 나는 그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선택에는 꽤 많은 이유들이 따라붙었고, 조별 발표를 준비하기 전까지는 그 선택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 수업은 <조직사회와 개인>이라는 필수 과목으로, 매주 한 팀씩 주어진 영화를 분석하고 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직'과 연관된 주제를 발표하게 된다. 일단 첫 번째 고비는 우리 팀에게 주어진 영화가 100% 프랑스어 다큐멘터리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자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영화를 두 번 돌려보며 최대한의 뉘앙스를 파악하려고 애썼고 여전히 많은 부분은 물음표 투성이로 남겨둔 채 조모임에 참석했다. 조모임에서 나온 여러 주제 중 최대한 영화 내용을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택했고, 그것이 유일한 내 생존 전략이었다. 분명 프랑스인 친구들한테 이 발표는 비교적 '날로 먹을 수 있는' 류의 발표일 거다. 하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10분 남짓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일주일 내내 책 한 권과 몇 개의 리포트, 수십 개의 기사를 뒤져야 했다. 품이 이렇게 많이 들 일이 아닐 텐데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매일매일 쌓이는 다른 과목의 과제 속에서도 하루에도 몇 시간씩 쪼개 이걸 준비했다. 특히 남들 앞에서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도록 완벽에 가깝게 준비하는 편이기 때문에 더더욱. 결국엔 쪽팔리기 싫어서 그렇다.
그 한 주 내내 진짜 셀 수 없는 좌절을 맛봤다. 여러 번 후회도 했다. (심지어 '나는 이 곳에 온 걸 후회한다'는 제목의 글을 쓸 뻔했다. 시간이 없어서 못 썼지만.) 왜 나는 대책 없이 과감할까, 왜 앞뒤 재지 않고 이 수업에 뛰어들었나, 심지어는 왜 다시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을까... 끊임없는 현타에 시달렸다. 내 능력을 의심하다가, 한동안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혀있다가, 그래도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토닥이기를 반복했고 이 모든 감정 변화를 누구한테 털어놓는 대신 그냥 삼키고 말았다. 어차피 내가 벌인 일이니까 책임은 내가 져야 된다는 생각 하나로.
그렇게 디데이가 되었고, 반 친구들 앞에 서자 떨림은 차차 가라앉았다. 예전에 무슨 방송 프로그램에서 장도연이 무대 공포증에도 불구하고 남들 앞에서 공연을 할 수 있는 비법으로, 앞에 있는 관객들이 다 'X밥'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도 수없이 그 생각을 되뇌었고, 꽤나 효과가 있었다. 이제야 얘기지만, 아마 발표는 언어 능력보다 성격적인 면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주목받는 거 꽤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다른 조원들보다 내가 학생들한테 더 많은 질문을 던지며 그들의 참여를 유도했고, 나름 나쁘지 않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물론 발표가 길어지며 발음은 습관대로 여러 번 꼬이고(이상하게 외국어를 혼자 너무 오래 말하면 발음이 점점 깨진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만족스럽게 발표를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교수님이 발표한 팀원 모두에게 고맙다고 한 말을 마지막으로 두 시간 동안 이어진 발표가 끝났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휴, 이제 끝이다' 안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교수님이 특히 ㅇㅇ(내 이름)에게 감사하고 싶다며 다른 나라 언어로 이 정도로 꽤 명확하게 발표하는 건 자신도 못할 것 같다며 그동안 많은 노력을 한 게 보인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박수를 다시 한번 쳐주자고 얘기하셔서 정말 얼떨떨하고 또 뻘쭘하게 그 앞에 서서(??!??? 으ㅇㅔ????? 정말 이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 반 친구들의 박수와 조원 친구들의 따스한 눈길(그 순간 그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는 그들한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만으로 더욱 열심히 했기 때문에. 걔넨 그걸 알까 몰라.)을 받았다.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이 벅찼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파노라마처럼....어흐긓어흑.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어? 될 것 같은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를 시발점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버리고 뒤늦게 수습하느라 골치 썩는 류의 사람. 그 대담함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일등 공신이자, 평생의 웬수다. 정말 끔찍하지만 나는 안다, 또 이걸 시작으로(심지어 평가도 좋았으니) 앞으로도 쭉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경영 수업에 도전할 것이라는 걸. 학교는 내가 마음껏 도전하고 실패해도 큰 타격 없이 발전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한다. (성과가 중요한 회사가 아니니까!) 발전하는 내가 좋..좋다.
PS. 끝나고 나오는데 같은 반 친구들이 프랑스어 언제부터 배운 거냐고 물어봤다. 그걸 시작으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학교를 나서는데 기분이 째지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