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종료아동의 미래 (장녀 편)

스무살의 위탁부모

by 아론

11살의 어머니의 암투병과 아버지와의 이혼, 16살의 어머니의 사망으로 인해 나에게 주어진 역할들이 있었다. 나를 돌봐주시는 친이모가 계셨지만 나는 스무살이 되자마자 나이차이 6살 차이 막내동생의 위탁부모가 되어야했다. 이 때문인지 야속하게도 나는 스무살때 이후로 받을 수 있을 법한 나라에서의 지원이 모두 끊겼다. 물론, 부모님의 이혼 이후 양육권자인 어머니가 암말기 환자였기 때문에 실질적 소득이 없었다. 그 당시 2010년도에는 나라에서의 복지혜택이 다양하지 못했고, 어머니 앞으로 들어져있는 보험금으로 간신히 생활이 가능했다. 그런 우리도 '기초생활 수급자'라는 제도를 통해 구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2010년도에는 다양한 복지혜택이 없었고, 때문에 교회 등에서 해오는 구제사역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적이 좋은 나는 장학금을 받곤 하였다.

그래도 고등학생이 되어 복지혜택으로 교복을 해주고, 급식비를 지원해주는 등의 나라에서 도움을 받았다. 특히나 급식카드라고 불리는 꿈나무 카드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고 간식을 사먹기도 했다. 나의 아끼는 친구들에게 통크게 한끼를 쏘기도 했다. 그 때 당시에 입는 옷이라고는 교복이 전부였기에 매일 샤워와 다리미질 등 용모를 단정히 꾸미는 나는 친구들에게 가난을 들키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지,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친구들이 가족이야기를 할 때면 특히나 '엄마' 이야기를 하면 나는 자연스럽게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싫었고,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 공부하는 친구들 때문인지 나도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고등학교에서 살았다. 물론, 아버지의 벌이가 좋고 우리집도 잘 살 시절에는 집에 피아노 개인과외를 부를 정도로 집이 풍족하였고 사교육도 5개 이상씩 했었다. 하지만 집안이 기울고 나서부터는 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장녀로서 아버지께 개인과외 하나 부탁드리기도 많이 미안했다. 하지만, 늘 1등급을 유지해오던 나의 국어성적이, 일주일 두번 개인과외 2시간의 국어 사교육으로 금새 따라잡히곤 하는 내신성적 현실을 보며 날카롭게 아버지에게 국어과외를 시켜달라 말씀드린 적은 있었다. 이마저도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으로 무효가 되었다. 흔히 말하는 "대학대신 공장가겠다"는 쌍팔년도식 사고방식으로 나는 일주일간 학교를 나가지 않았었고 당시 담임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하셨었다. 아버지는 담임선생님 손에 아버지가 판매하시는 막걸리 몇병을 쥐어드리며, 딸에게 국어과외를 시켜야하는지 여쭤보셨다. 미운사연을 가졌지만 넉살 좋은 웃음을 가지신 아버지의 눈 주름살을 보시곤 선생님은 "아버지 그런말 마세요." 하셨다. 그렇게 나의 짧은 방황은 담임선생님과 나의 한 친구 때문에 막을 내렸다.

나의 방황의 막을 내리게 해주었던 친구는 국어교사를 꿈꾸던 친구였다. 내가 사물함에 가득한 입시서적들을 버리며 "할머니랑 폐지 줍고 사는게 나에겐 더 어울린다"고 볼멘소리를 하자 주저앉아 울던 친구때문에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때 나의 모습을 보시던 한 계약직 선생님은 "너보다 힘든 친구들도 많다"고 하셨다. 나는 이 말 또한 그냥 넘기지 않았다. 물론 나의 사연을 그 선생님께 다 말씀 드리지도, 심지어 가정방문한 담임선생님께도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미안하게도 당시에 내가 가장 힘들다는 피해의식에 가득했었다. 그러다가 오랜시간이 흐른 뒤 매일 같이 야자를 하곤하던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책상하나 없는 방한칸에 살던 친구의 현실을 알게되고 집에 와 펑펑 울기도 하였다. 친구도 나와같이 재혼가정에서 버티지 못해 자신의 친모와 편부모 가정으로 살던 아이였다. 내가 힘들때면 브로콜리너마저와 버스커버스커 음악을 들려주곤 하던 친구였다. (*내가 할머니와 폐지줍고 사는게 더 어울린다고 말한 이유는 당시 야자 끝나고 11시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실제로 할머니 집에서 공부하는 날이면 폐지를 주우며 집에 들어가곤 했다. 할머니는 물론 서울의 단칸방의 땅과 집을 가지셨지만서도 나이든 몸으로 폐지를 주우실만큼 성실하셨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셨다. 새벽 5시면 일어나 산에서 주워오신 도토리로 도토리묵을 쑤곤 하셨는데 때문인지 새벽일찍부터 학교에 가 공부를 해야하는 나에게는 할머니 댁이 최고의 환경이었다.)

그 때 나는 학업 스트레스로 머리가 복잡할때면 광화문의 교보문고를 가는 것을 좋아했다. 매일 밤 11시까지의 야자가 지칠법했다. 이때의 성실함에 대한 훈련은 추후에 회사원이 되어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밤새 방송국을 지켜야하는 라디오 조연출 생활을 할때만 더욱 그랬다. 언제 재난방송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새벽 5시의 지진 재난 방송도 지켜낸 나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는 학업에 지칠때면 학교 근처 초록버스 하나를 타고 바로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하곤 했다. 그 때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가수 이한철의 흘러간다 였다. 습지생태보고서라는 책과 드라마를 재밌게 보았는데 그 때 알게된 곡이었다. 이 드라마는 2012년 당시 88만원 세대의 비루한 현실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 이달의 PD상을 받기도 한 작품이었다.

광화문은 나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암투병을 하신 어머니의 병원, 강북삼성병원이 근처에 있기도 하였고 우리가 가장 잘 살던 시절 그래봐야 벽제의 작은 한 시골 아파트에서 살던 때에도 르네상스시기라 느끼며 놀러왔던 곳이 광화문의 세종문화회관이었다. 어머니의 납골당에도 걸린 사진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세자매를 쪼르르 품에 안으신 40대의 젊은 어머니의 사진이다.

슬럼프가 오는 날은 일단 광화문 교보문고에 간다. 책이 주는 압도감을 느낀다. 마음에 드는 코너로 향한다. 눈에 띄는 책을 하나 고른다. 주저앉아서 마냥 책속에 파고들어 그 책을 몇시간이곤 읽는다. 꼭 베스트셀러가 아니어도 괜찮다. 오늘 책꽂이에 꽂혀 사라질 책도 괜찮다. 그렇게 몇시간이고 책 속의 세상에 파고들고나면 기분이 후련했다. 글 속의 활자들로 나의 미운 마음들을 갈기갈기 쟁기질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파종하듯 새로운 단단한 땅의 마음이 되새겨진 기분이었다. 그 후련함을 좋아했다. 그 후련함을 사랑했다.

그렇게 나의 10대 시절을 보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레미제라블이라는 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졌으며 기형도 시인의 말처럼 세상에 질투할 것들이 많아 나 스스로를 단한번도 사랑하지 못했다. 그리고 절망적인 날이면, 기도하며 예수님을 찾았다. 심지어 환영이 된 어머니 마저도 예수님은 쫓아내 주시며 내 마음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셨다.

많이 아팠지만 화살기도하듯 마음으로 살았다. 누군가는 역차별이라고 느꼈을 나의 가난에 대해 중산층이 미워 저주한적도 있지만, 단 한명도 가난한 사람이 없길 모두가 중산층이 되길 바라기도 하였다. 비루하게 느껴질지언정 그들을 닮고 싶었다. 나의 이모의 찬란한 젊은 시절을 바탕으로 꿈을 꾸었고 또래 친구들과 함께 펼쳐나갔다. 내가 바라던 벚꽃이 예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4년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했었다. 물론 신입생때의 방황으로 후에 재입학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엄마가 남겨주신 유산과 내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해외 여행도 몇번 다녀왔다. 대만, 유럽, 일본 등... 교회에서 다같이 유럽으로 선교를 가기도 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물론 내가 마주한 현실들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생채기와 성장통도 가득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원대한 꿈을 꾸었고, 비록 최선의 것들을 이루지는 못한 차선의 삶이었지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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