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살아내기로 했다3

가득한 게 좋은 줄 알았다

by 꿈부

가득한 게 좋은 줄 알았다

무언가를 채워야 안심이 됐다.
일정표도, 통장도, 집도,
가득 찬 상태여야
내가 괜찮은 사람 같았다.


스케쥴이 없는 다음 달 달력을 보기가 겁났고,

잔고가 없는 통장을 보기가 두려웠다.


아무것도 없는 시절을 오래 살았다.
버는 족족 빠져나가던 통장,
비어 있는 냉장고,
없다는 이유로 움츠러들던 순간들.

그 순간들의 허기짐의 후유증은 컸다.


아주 어릴적 어슴푸레 스치는 기억이 있다.

꿈이었는지, 실제 있었던 일인지 가물하다.

눈을 감으면 자주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5살 정도의 어린 내가 아무도 없는 집의 마루에

혼자 앉아있던 봄날이었다.

그러다 뭐에 홀린듯

동네에서 돌아가며 운영하던 부녀회 가게에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라면 한봉을 꺼내와 날라면을 깨어먹던 내가 보인다.

허기졌던 내가 있었다.


그렇다.

늘 허기진 난 채우는 것에 집착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엄마는 손이 커.'란 말을 자주했다.

냉장고와 창고에는

한 달은 고이 먹을 수 있는 먹거리로 채워져있다.


그 뿐이랴.

집을 한 채 사고 부터 다시 두 채를 원했고,

다섯째에서 다시 열채를 만들었다.

숫자가 늘어날수록 마음이 놓였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을수록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득 채웠는데도 허전했다.
분명 손에 쥔 건 늘었는데,
가슴 안쪽이 텅 빈 기분이었다.

늘 무언가를 더 채워야
조금 덜 불안했다.
그 불안을 없애려고
더 벌고, 더 사고, 더 만나고, 더 바빠졌다.


그렇게 효율만 따지며 살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건조해졌다.

감정은 눌러두고,
시간은 쪼개 쓰고,
모든 걸 생산성과 효율로만 따졌더니
마음에 각질이 일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 나이 때문만은 아닐 거다.

가끔은 쓸데없이도 살아야했다.
감정도, 시간도, 낭만도.

그래야,
좀 따숩지 않았을까?

늘 냉기 돋는 생각들을 해야했다.

긴장한 채로.


생각도 감정도 쉴 틈이 없었다.
버려야 할 감정도,
비워야 할 마음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


탈이 나더라.

마음도 탈이나고,

물질적 집착도 탈이 나더라.

사고가 크게 나더라.


지금은 안다.

진짜 단단한 사람은
가득 채운 사람이 아니라
비워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그 빈 공간을 거닐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나는 그걸 너무 늦게 배웠다.
무언가를 쥐고 있을 때보다
놓을 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내 마음에 자리가 생겼다.


가득한 게

꼭 좋은 건 아니었다.

이전 02화나는 다시 살아내기로 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