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누구도 아닌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나'라는 사실!
한 겨울에 내 마음에는 봄이 왔다. 분홍 분홍 한 미들 사이즈 가방이 완성된 것이다. 사실, 이 패키지를 살 때 많은 고민을 했다. 쉬는 기간 동안 다양한 가방을 만들며 실력을 조금 더 쌓고자 이런저런 패키지를 샀는데, 하필 남은 가방 색상이 핑크라니...... 가방은 정말 마음에 드는데 어떡해야 하나 많은 고민이 있었다. 나는 핑크랑 친하지 않다. 그 이유는 참 많다. 어릴 적 과도하게 여성스러운 색상과 옷을 즐겨했던 나는 핑크를 참 좋아했다. 그러나, 너무나 털털했던 성격 탓에 핑크는 나에게 오면 언제나 때가 꼬질꼬질해져서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여러 차례 당하고 핑크와는 멀어져 갔다. 그나마 차선책으로 찾은 색이 보라색이나 혹은 연보라, 버건디 등등으로 좋아하는 색을 바뀌어갔다. 지금도 여전히 그 털털함은 남아있고 그 덕에 커서는 검정만 선호하는 올블랙의 여인이 되었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손 내민 '핑크색 패키지', 그 고운 자태가 자꾸만 나에게 손짓을 했다. 홀리듯이 구매하고 묵혀둔지 수개월..... 한번 패키지 완성의 성취감에 맛 들인 나는 요즘 많은 가방들을 완성시키고 나서야 이 친구의 손짓을 이제야 받아들이기로 한다.
작업할 때는 조용히 적막해지는 공기가 어색해서 꼭 무엇인가 드라마를 틀고 하는데, 이번에는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며 천천히 가방을 완성해가기로 했다. 시작부터 고난의 시작, 이 특유의 꼬임 손잡이는 같은 패키지를 산 가죽 공예인에게 많은 원성을 들은 부분이었다. 어렵고 힘든 구간이었다. 나 또한 정신 수양하는 기분으로 시작했다. 손이 아프고 손끝이 빨개졌다. 그럼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작업할 때마다 핑크 가죽 덕분인지 마음이 몽글몽글 행복했다. 드라마 덕분인 걸까? 돌아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드라마의 끝과 함께 가방도 완성이 되었다. 드라마와 같이 울고 웃으며 완성한 내 마음의 봄꽃 같은 핑크 가방. 사실 아직 어깨 스트랩이 남아있다. 스트랩에 바느질과 베이트 코트는 올렸고 마지막 엣지 작업을 마쳐야 비로소 완벽한 완성이지만 가방을 완성시킨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정말 마음에 쏙 들기 때문이다.
가방을 만드는 중간중간, 그동안 하지 않았던 실수도 참 많이 했다. 특히 D링에 (가방 중간에 연결 부속) 연결할 때 실수가 있어서 한 바터면 줄이 짧아질 뻔했다. 그리고, 뒤판 합체할 때도 딱 떨어지게 맞지 않아서 앞판도 살짝 울고 있다. 게다가 가방을 뒤집을 때 충분히 드라이기로 말랑하게 만들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뒤집었더니 바닥 부분이 좀 구겨졌다. 혹시 열을 가하면 나아질 때 싶어서 며칠 따뜻한 바닥에 뒀는데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냥 운명이려니 받아들이려 한다.
예전에는 애써 만든 가방에 실수가 생기면 계속 그 생각만 했다. 볼 때마다 화가 났고 속상했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실수한걸 줄줄 말해가면서 또 들춰내고 후회하고 상대방이 그제야 '아 진짜 이건 잘못된 거였어?' 하면 그 말에 또 며칠을 심란해했다.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이 가방에서 얻은 배움은 무엇인지 또 실수가 있었다면 다음번엔 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끝낸다. 더 이상의 나쁜 생각이 자꾸만 나면 '다음에 잘하자!' 생각하고 나쁜 생각을 딱 끊어버리려고 노력한다. 그러고 나서는 이번에 만든 가방에서 가장 잘된 부분은 뭐였는지 찾아보고 스스로에게 칭찬해준다. 스스로도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칭찬해준다.
바느질 깔끔하게 잘했네? 기특하다.
이번 가방은 색을 참 잘 골랐네? 잘했다.
어려운 과정인데도 참 잘 만들었다. 수고했어.
예쁘다 예쁘다 해주기 시작하면 점점 예뻐 보이고, 그 점만 보인다. 그래서 이런 '시'도 있지 않은가?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내 가죽공예 가방도 그렇다. 자세히 살펴보고 오래오래 보다 보면 그 안에 있는 정성과 마음이 느껴져 더욱 예쁘다. 밉다 밉다 하면서 잘못된 점을 찾아내면 미운 것만 보이고 자꾸 그곳에만 눈이 간다. 하지만 잘 살피고 좋은 부분을 보려 하면 예쁘고 사랑스럽다.
가방을 만들며 배운 삶의 진리도 이것이다. 실수에 집중하지 말고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자는 것,
어디 이런 일이 가방뿐이겠는가, 나 자신도 그렇다. 나의 나쁜 점만 보려고 하면 할수록 내가 싫어지고 나의 실수에만 집중할수록 내가 더욱 나쁘게 보인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도 하고 어떤 사람이든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 자신을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구석 투성이다. 자꾸 그 부분만 보이고 화가 난다.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미워한다. 왜 이모양이야? 왜 누구누구보다 못하지? 왜 이렇게 못났어? 나쁜 점만 찾아가다 보면 결국에 내 좋은 점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사람이 모두 좋은 점만 있겠으며, 모두 나쁜 점만 있겠는가? 다 받아들이고 편한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잠시 20대의 괴로웠던 나를 회상하게 된다.
나는 결혼 전의 '나'와 결혼 후의'나'로 나뉜다. 그리고 가죽공예를 하기 전의 '나'와 후의 '나'로 나뉜다. 가장 후자인 가죽공예를 한 후의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나'를 사랑하고 있다. 뭐라도 지금처럼 쪼물딱 거리며 만들 수 있는 내가 좋고, 잘 만들었든 못 만들었든 가죽공예를 할 수 있는 내가 좋다. 내가 기대한 것보다 상과가 낮아도 내가 이 일을 하기 전의 '나'와 비교해 봤을 땐 지금이 가장 잘하고 있음을 알기에 나를 조금 더 칭찬해주고 이끌어주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내가 갑자기 다른 내가 돼서 훨씬 실력이 좋아졌다거나 엄청난 성장 해서 내가 좋아진 것이 아니다. 분명 결단코 아니다.
내가 가죽공예를 하면서 나 자신이 좋아진 것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나'라는 사실이다.
'나'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고 그 누구와도 똑같지 않고 그 누구보다 나다운 나라는 사실이다.
가죽공예 작품도 마찬가지다. 가죽공예로 만들어진 물건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아무리 같은 모양에 같은 실에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 하더라도, 절대 같은 가죽은 쓸 수 없고(예를 들어 같은'소'가죽을 썼다 하더라도 그 가죽 한 장 안에서도 부위별로 가죽의 특징이 나뉜다.) , 절대 똑같은 모양의 바느질 땀은 나올 수 없다. 그런 하나하나의 다름이 모여 단 하나의 가죽공예 작품이 만들어진다. 물론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에 어떤 실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빚어진 그 물건의 역사는 또 다름을 만들고 그 작품만에 고유성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 되는 것이다.
실수는 잘 마무리하면 된다. 완벽하게 만들면 좋겠지만 그것은 수십 번의 실수 끝에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다. '완벽'의 틀에 갇혀서 자꾸만 기성품과 비교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명품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작아졌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내가 '나'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처럼 내 작품들도 당당하게 이 세상에 내보이고 싶어졌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꼭 내 이름을 건 이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들을 꼭 선보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