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나 Mar 22. 2022

코로나가 내 집까지 다가왔다. 정확히는 나에게 왔다.

코로나를 겪으며 느낀 수많은 감정들......

그동안 코시국~코시국~ 하면서도 확진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안 했었다. 특별히 주변에 확진자를 본 적도 없고

접촉한 적도 없었던 탓에 그저 남의 나라 얘기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내가 사는 고양시 안에서만 오천명이 넘게 나와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점점 무뎌졌다는 말이 더욱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점차 점차 코로나는 내 앞으로 포위망이 좁혀 오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걸음  주변, 내 지인..... 기어이  집까지 들어왔다. 그동안의 나의 입방정들을 한없이 반성하고 반성한다.

'오미크론은 감기처럼 앓고 지난대~'

'마스크만 잘 쓰면 상관없대~'

카더라, 뭐뭐 카더라 하는 말들을 믿으며  집에는 그런 일이 없겠거니, 정말  그대로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이제  집안에 그런 일이 생겼다. 너무나 세게 왔다.  가족 릴레이 확진이라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첫 타자였던 신랑의 코로나 확진 직전 날, 아침은 정말 평화로운 시작이었다. 동시에 너무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날의 새벽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에 홀로 깨서 다이어리를 쓰고 마음을 다지며 글을 쓰고 하루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특히나, 나름대로 심적으로 충만한 겨울방학을 보내고 이런저런 올 해에 계획이 많던 나는 새벽 기상이 슬슬 행복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국에서도 가족 모두 무탈히 보내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라는 감사 일기장의 만년필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평소보다 일찍 깬 남편이 난데없이 자가 키트가 없냐고 묻는 것이다. 별생각 없이 집에 굴러다니던 여유분 한 개를 내어 주었다. 갑자기 거실에서 청천벽력 같은 말이 들려왔다.

"나 두줄이야. PCR 하러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평소에 무덤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양반이 당황한 목소리가 역력했다. 나는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누군가에게 뒤통수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까지 얼떨떨해졌다. 급하게 마스크 주워서 쓰고 거실로 나갔더니 신랑도 화장실에서 씻고 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한집안 거실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 둘이 앉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해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다 같이 가서 검사받고 오늘 집에서 근신하자. 난 인터넷으로 장을 좀 봐 둬야겠다. 아니다, 이따 오면서 약을 사야 하나? 아니야 나도 두줄이면 누가 약사와? 그것보다 여보 많이 아프니? 괜찮아? 이제 어떡하지? 애들 어떡해?"


그렇게 보건소에  남편은 다음날 확진받았고 우리는 함께 자가 격리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난주 월요일 아침, 정확히는 3 6 일이다. 고로  글을 쓰는 지금  순간, 3 22  정신없이 2주가 넘는 시간이 흘러갔다.  사이 하나하나 가족들은 확진되기 시작했다.

너무 일찍 검사한 탓에 월화는 괜찮았지만 수요일부터 작은 아이가 콧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급히 아이들을 챙겨 근처 보건소에 걸어갔다. 이때만큼은 뚜벅이인 내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고 택시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셋이 나란히 손잡고 걸어가는 수밖에는....

수요일에 작은 아이가 확진되고 이제 가족들은 둘둘씩 나뉘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쯤 지나자, 강인 체력이라 자부하던 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결국 또 PCR을 하러 큰 아이와 나란히 둘이 갔다. 동네 보건소는 다행히도 사람이 붐비지 않았다. 둘이 보건소를 걸어가는데 전날과 다르게 내 뼈들이 어그 적거리는 것 같은 미세한 통증과 몸이 찌뿌둥한 것이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다음날 나 또한, 확진을 받았다.


집안에 유일한 음성자는 확진자 세명 덕에 본인이 격리되는 어이없는 상황이 됐다. 건강 염려증이 있는 큰 아이는 다행히 혼자 음성인 덕분에 방에서 스스로 잘 격리(?)했다.

큰 아이는 스스로를 슈퍼 유전자일 수도 있다며 큰소리 떵떵 치더니 불행히도 다음날부터 큰 아이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마지막에 아프고 제일 심하게 앓았다.

큰 아이 자가격리일을 마지막으로 3월 20일 2주일 간의 코로나는 우리 집에서 이때까지 중 크고 센 한방을 날리며 사라져 갔다.


처음 이 글을 작성할 때는 코로나 확진 후 치료기를 매일 적으려고 결심했는데, 매일매일 고된 격리생활의 집안일들과 집안에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일들이 너무 힘들어서 앉을 틈도 없고 글을 쓸 틈도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아프고부터는 아예 글을 쓸 의욕을 상실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엉덩이 붙일 시간이 생기면 이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바라며 매일 성경과 좋은 책의 글귀들을 필사하고 책을 읽어 내려가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 한 가지 덧붙이면, 드라마를 구장창 봤다. 평소의 곱절의 집안일들을 하며 끊임없이 드라마를 틀었다. 어느덧  드라마  편을 정주행과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다섯 편을 섭렵하는  드라마인생 최고의 전성기(?) 보냈다.


그렇게나마 현실도피를 하면 숨통이 트이는  같았다. 비좁은 집에서 아웅다웅 넷이서 지내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 힘든 일이었다. 아침 먹이고 돌아서면 점심이고,  저녁이고........ * 요기*에게 많이 기대 봤지만 그래 봐야 치우는 것은  몫이.

게다가 한번 시켜 먹으면 시켜먹은 대로 일회용품 쓰레기들이 넘쳐났다. 그냥 있는 대로 대충 먹자는 주의로 결정지었는데, 이번엔 양가 부모님들께서 난리셨다. 무조건 잘 먹어야 빨리 낫는다고 매일 전화로 잔소리를 해주신 덕분에, 이번엔 집에 건강식을 위한 쿠팡*과 택배로 쓰레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악순환이었다.

대체 어떻게 잘 먹어야 하는 거지? 그냥 세끼 먹고사는 것도 힘든데...집안에 유일한 요리사는 나뿐이고 나 또한 환자다. 포기하자. 포기하자.

야심 차게 계획한 건강식 프로젝트는 단 며칠 만에 끝이 나고 대기업을 믿어보자며 대기업표 국과 냉동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이번엔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신랑이 확진이 되고 나서 내가 대리인으로 동네에서 약을 지어왔다. 작은아이 때도 난 음성이었기에 내가 대리로 가서 약을 짓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내가 확진이 돼서 나서는 정작 대리로 약을 지을 수가 없었다. 닥터 나우라는 앱도 생각해봤지만 내 집 주변은 대기도 길었거니와 내가 모르는 지역의 의사에게

비대면으로 약을 처방받아서 약을 배달받는 일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신랑 약을 먹기로 했다.

그러자 우리 집 '바른생활 사나이' 큰 아이가 학교에서 약물 오남용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며 계속 말리기 시작했다.

당장 약은 없고 열은 오르기 시작하고 고열과 오한이 시작된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들아.. 엄마 딱 한 번만 약물 오남용 하면 안 될까?"


음성이지만 초등학생인  아이를 병원에 대리인으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코로나 증상도 같고 같은 성인이니까 괜찮을 거야 스스로 위로하며 신랑   봉지를 먹고 잠들었다. 밤에 열이  올라서 타이레놀을 추가로 먹고 혼자 방에서 끙끙대며 버텼더니 다행히 나는 하루 이틀 정도 열이 나고 괜찮아졌다. 그러나, 그다음 .....  아이가 아파지면서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가족이 확진자라 격리 중인데 초등학생 아이는 어떻게 PCR 하러 보건소에 가야 한다 말인가?

약은 어디서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 신랑의 격리가 풀리려면 2일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반 병원에서 신속항원 결과로 확진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큰 아이가 PCR로 코로나 진단을 받아야 약을 지을 수 있을 텐데, 혼자서 어떻게 PCR을 하러 가야 한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때마침 작은 아이가 소아 재택용 자가격리 키트를 받아서 해열제와 감기약은 집에 넉넉하게 있었다. 큰 아이가 나중에 증상이 나왔을 때는, 격리자인 부모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차라리 같이 걸렸으면 나았을 텐데..... 하는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하게 되었다.  

약물 오남용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큰 아들은 곧은 성정 덕분에 이틀을 쌩으로 아프고, 일반 감기약과 해열제로 버텨낸 후에 아빠가 자가격리 풀리고 나서야 PCR을 하러 보건소에 갈 수 있었다. 가장 늦게 확진 판정을 받고 자가격리도 가장 길게 하게 되었다.




 코로나를 겪으며 느낀 점이 있다면, 정말 사람은 자신의 앞일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알았다고 한들 달라졌을까? 싶긴 하지만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채 엄청 쎄게 여러 대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하나 해결하면 하나가 터지고 가족들이 줄줄이 릴레이로 아픈 상황들........

신랑이 확진되고 나서 남은 가족들은 증상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걱정과 근심에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문하나를 사이에 놓고 아들과 아빠, 아내와 남편은 생이별(?)을 했다.

이 와중에 초등학생 작은 아이는 두 번째 확진되고 나서는 아이답게 신나 하며 소리 질렀다.

"아빠  확진이야! 아빠랑 만날  있어!
아빠  열어! "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아빠랑 만나서 좋다고 했다.

그래, 누구라도 신나게 살자. 다들 죽상일 필요 없잖아?

가족들 모두 코로나 증상이 끝날 무렵에는 폭풍 설사를 하며 그 거대한 막을 내렸다.


이제 가족 모두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이  보인다. 우리 가족이 코로나가 나은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확진됐다는 기사가 연이어 이어졌다. 막연히 두려웠던 코로나, 겪고나니 기대 이상으로  고되고 아프고 괴로운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안에서 가족의 소중함과 건강하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살면서   아프기도 처음이었지만 넷이 오롯이 얼굴 마주하며 의지하고  것도 처음일 것이다. 코로나를 겪은 것이 특별할 것도 없고 좋은 추억도 아닐테지만 이렇게 남기는 이유는, 이것 또한 우리 가족에겐 오래 기억될 하나의 추억이 될 것 같아서이다. 혹은 누군가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와 공감이 된다면 그것도 감사할 일이다.




코로나의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 불평이 터지기도 했고 불만이 쌓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나마 대한민국 국민임에 감사했다. 여러 상황 안 좋은 속에서도 비교적 다른 나라의 체계보다는 낫다는 것을 체감했고 불평불만이 늘어날수록 나 자신만 괴롭다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잘 해쳐 나갈 궁리만 했던 것 같다.

내 주변에 절대 코로나 확진자가 없길 바랬지만 하나둘씩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 작게라도 돕는 방법을 찾고 있다. 온 거족이 코로나를 겪으며 작은 도움이라도 받는 사람 입장에선 얼마나 큰 선물인지 깨달았기에 더욱 돕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


나는 이웃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함께 운동하는 동네 언니는 위로의 꽃다발도 놓아두고, 내가 지칠 무렵, 문 앞에 도넛을 놓아두고 가주기도 했다. 교회 지인분께서 대신 장을 봐주기도 하셨다. 다른 지인들도 소식을 알고는 매일 문자와 전화를 준 사람도 많다.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하고 고마운 손길에 한국은 살만하다고 느껴졌다.

가끔 지역 맘 카페에 해열제가 부족해서 동동거리는 엄마들에게 무료로 전달해주는 동네 이웃분들도 계시고 해열제를 찾을 수 있는 곳을 알려주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한국은 정말 살만하다.

큰일을 겪고 나니 알게 된 따뜻한 손길들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작가의 이전글 "금쪽 상담소"를 보며 마음을 치유하는 겨울나기 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