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보고는 일주일 뒤였다. 내가 분석한 IT비용은 한 장의 장표가 되어 프로젝트 보고서에 삽입됐다.
대한통신 IT비용: 혁신투자 50% , 운영비용 50%
벤치마킹 IT비용: 혁신투자 35%, 운영비용 65%
대한통신의 IT 운영비용이 벤치마킹 대비 15%p 낮음.
분석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IT운영비용이 과도하게 높다는 사실에 기반해 전사 차원의 IT혁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쳐야 하는데 정반대 결과를 내놓았다. 한 과장은 괜찮다고 시부저기 말했지만 내겐 입사가 걸려있었다. 어떻게든 IT혁신의 필요성을 설복해야만 혁신실에서 차세대 IT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우리 또한 후속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후속 프로젝트 수주도, 내 정사원 전환도 불가했다.
회의록 작성을 위해 보고에 들어간 나는 테이블에 출력한 보고서를 올려 놓으며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보고에는 혁신기획실 임원 뿐만 아니라 사업부와 IT본부장도 배석했다. 여러 이해 관계자들이 있어 정 상무가 일부러 논란의 소지가 있을 만한 메시지는 배제한 걸 수도 있었다.
우리 가설대로 IT 운영비용이 과도히 높다는 메시지를 던지면 IT본부장은 불편해 했을 것이다. 사업부 별로 IT비용이 중구난방으로 집행된다는 메시지를 던지면 사업부 임원들도 반발할 게 뻔했다.
정 상무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쉬운 선택을 한 걸까? 아니면 그저 이게 팩트이기 때문에 팩트 그대로 보고하기로 마음먹은 걸 까?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발표가 시작되자 정 상무는 스근히 대한통신의 IT관련 이슈들을 풀어냈다. 비전 프로젝트에 대한 해석을 시작으로 사업운영 모델에 대한 시사점과 현 대한통신 운영체제와 IT 시스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논했다.
장표가 한 장 지나칠 때 마다 제품개발부터 고객서비스 인력 운영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이슈가 제기됐다. 대한통신 임원들은 때론 정 상무의 말을 경청하기도 하고 때론 그와 논쟁을 벌이며 논의를 이어갔다. 그간 혁신실 임원들과 어울리기 바빴던 그를 마주할 기회가 없어서인지 그가 발표하는 모습은 새삼 신선했다. 그는 무대 위에 오른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발성과 몸짓을 섞어가며 능숙히 관객을 압도했다.
보고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드디어 내가 만든 IT비용 장표가 나왔다. 정 상무는 참석자들에게 장표를 볼 충분한 시간을 주려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후 그가 나지막히 던진 한 마디는 내 추측을 여지없이 깨뜨린 회심의 일격이었다.
“대한통신 IT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비용엔 아무런 문제점도 없다고 분석됐는데 무슨 문제점을 말하려는 거지? 미간에 힘이 들어가며 골이 파였다. 귀는 쫑긋 세워졌다.
“IT 거버넌스 입니다. 비용 분석을 보면 아시겠지만 대한통신사의 혁신투자와 운영비용 비율이 같다고 분석됐습니다. 세계 선도 통신사들의 IT비용을 분석한 수치와 비교하면 말이 안되는 비율입니다. 그만큼 관리가 안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업계획서 상 신규 시스템 투자로 집행된 예산이 실제 투자 항목을 보면 기존 시스템 운영비용입니다. 예를 들면 시스템 ‘고도화’ 사업입니다.”
‘고도화’란 말에 나도 모르게 마우스를 쥐고 있던 검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고도화 라면 매크로를 돌려 혁신투자로 일괄 분류했던 사업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혁신투자처럼 보이지만 세부 내역을 보면 70% 이상이 기존 시스템 운영비용을 집행한 것 입니다. 운영 비용을 신규 투자처럼 보이도록 집행한 거죠.”
정 상무는 IT본부장을 향해 시선을 휘돌렸다. IT본부장은 표정을 일그리며 애써 시선을 피했다.
“고도화 프로젝트 뿐만이 아닙니다. 신규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기업고객 토탈 솔루션 사업계획’을 보시죠. 기업고객 토탈 솔루션은 실제로 재고관리와 제품 카탈로그 관리 상품을 합친 상품입니다. 이 두 상품의 관리 시스템들을 연계하기 위해 신규 사업을 발주한 겁니다. 실질적으로 기존 시스템들을 연동하기 위한 유지관리 사업인거죠.
지금으로선 이런 개별 프로젝트들을 통합 관리할 거버넌스 체계가 없기 때문에 비용집계 조차 힘들 정도로 관리가 안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대한통신의 IT비용은 혁신투자와 운영비용 비율을 분석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말을 마친 정 상무는 돌연 마커펜을 아귀세게 집어 들었다. 그리곤 낙제 성적표를 찢어 갈기듯 손을 크게 휘두르며 ‘X’자를 그었다. IT본부장 얼굴은 열증이 난 듯 벌겋게 달아 올랐다. 정 상무는 화면을 바라보는 대한통신 임원진들의 시선을 한번 훑은 후 말을 이었다.
“앞으로 ‘고객 가치 혁신’을 위해 사업은 더욱 다각화 될 거고 사업간 시너지는 어느 때보다 중요해집니다. 하지만 현재 IT 인프라와 거버넌스로는 그런 비즈니스 환경을 유연히 지원할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전사 차원의 IT 전략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전율이 심장을 관통했다. 나도 모르게 경탄성을 내지를 뻔 했다. 정 상무는 정확히 그가 원했던 메시지를 던졌다. IT비용 분석 결과는 세계 선도 통신사보다 투자비용 비율이 높다고 나왔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란 점은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명확한 팩트였다. 정 상무는 그 공감대를 근거로 대한통신 IT 투자비용이 제대로 분석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관리가 안되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분석결과와 전혀 상반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정 상무는 개별 사업 내역을 나보다 훨씬 세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언제 사무실 구석에 쌓여 있던 예산내역을 다 봤던 걸 까?
선공을 내준 IT본부장은 보고내용이 부정확하다며 표독스런 역공을 시전했다. 대한통신 IT에 있어선 자신이 전문가라 역설하려는 듯 전문용어와 장황한 설명을 곁들여 가면서 말이다. 그때마다 정 상무는 오연한 태도로 척척 방어해냈다. 정 상무는 모든 사실관계를 정확히 숙지하고 있었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언변으로 IT본부장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정 상무가 IT본부장을 벼랑 끝으로 몰아 넣었다 싶을 때 쯤, 적장을 격파한 돌격대장 뒤로 안개를 걷고 유유히 나타는 주군처럼 김호식 혁신기획실장이 등장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 상무님. 저희가 부족한 부분을 잘 짚어주셨어요. 사실 이 프로젝트를 발주한 건 사업운영 모델을 진단하기 위해서 였는데 오늘 보고를 들으니 운영모델과 IT인프라 전략은 병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통신 사업 특성상 IT가 워낙 중요해서 그렇기도 하고 지금 저희가 내세우는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IT전략에 대한 고민은 필수인 것 같습니다. 임이사님, 이참에 차세대 운영모델설계와 IT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를 통합해 진행하면 어떨까요?”
임수민 이사는 전략기획실 임원으로 오래 전부터 우리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 전략기획실 내에서 혁신실 친화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네. 그게 좋겠습니다. 내년 3월에 사업부장님께 차세대 IT 사업계획을 보고드려야 합니다. 안그래도 비전 작업에 맞춰 기존 IT 프로젝트들과는 차별적으로 진행하려 했는데 혁신실 주도로 보고를 준비해 주시면 어떨지 싶습니다. IT본부와 사업부에서도 최대한 지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주도권을 뺏긴 IT본부장의 안면이 각일각 일그러졌다. 하지만 회의 초반부터 켜켜이 쌓인 논리의 중압감을 버텨내긴 힘들어 보였다. 전사차원의 IT 전략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이미 형성됐다. 혁신이 필요했고, 혁신을 실현하기 위해선 IT본부가 아닌 제 3의 조직이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했다. 가장 큰 근거가 IT본부에서 제공했던 비용자료였으니 달리 반박할 명분도 없었다. 어센트와 어센트를 고용한 대한통신 혁신실의 승리이자 김호식 전무와 정주성 상무의 완승이었다.
보고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차세대 IT 전략‘ 프로젝트는 김호식 전무가 이끄는 혁신실에서 리드하게 됐다. 어센트는 프로젝트 총괄 상담역으로 내정됐다. 수의계약이었고 경쟁사는 없었다. 내 정사원 전환도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걸 의미했다. 후속 프로젝트가 확실해졌으니 나 하나쯤은 프로젝트 예산으로 언제든 입사 시킬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보고가 끝나고 하루 이틀이 지났지만 내 정사원 전환에 대한 언지는 없었다. 정 상무와 한 과장 모두 차세대 IT 전략 프로젝트 준비로 여유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지난 3개월 간 입사 프로세스는 이미 밟고 있었다. 정 상무를 비롯해 모두들 좋은 피드백을 준 탓에 2차와 3차 인터뷰도 수월히 통과했다.
최종보고 1주일 전엔 마지막 4차 인터뷰를 어센트 전략 그룹의 헤드파트너 이주완 대표와 진행하고 합격 통지를 받았다. 입사는 확정이었다. 날짜만 정해지면 됐다. 기대하는 날짜는 1월 2일이었지만 한 두 주 늦춰진다해도 괘념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하루 남았을 때 드디어 정 상무가 나를 불렀다.
“세윤 씨 덕분에 보고는 잘 끝났어요. 그리고 축하해요. 인터뷰도 통과했다는 얘기 들었어요. 이제 입사만 남았네요.”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축하해요’란 한 마디에 그간 쌓였던 노고가 눈녹듯 녹아내렸다. 이제 1주일만 지나면 한 해가 지날 참이었다. 달라질 건 크게 없었다. 내가 하던 일도, 프로젝트 팀원들이나 클라이언트들이 날 대하는 방식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인턴 생활 3개월 만에 정사원 전환이라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치수에게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알려주고 싶었다. 이제 나도 정사원이라고 말이다.
“입사는 공채로 진행할거니까 조금 만 더 기다리시면 돼요.”
정 상무가 말했다. 들뜬 기분 탓인지 한 동안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서야 ‘공채’라는 단어가 뒤통수를 강타했다. 계획대로라면 난 특채였다. 프로젝트 비용으로 내년 1월에 입사하는 케이스였다. 공채라면 입사 예정일은 3월이었다.
“공채요? 그럼 입사는 언제?...”
“이번 공채 입사 예정일은 3월 일거에요.”
정 상무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경력직 특채로 바로 입사할거라 생각했는데 3월에나 가능하다니. 그것도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들과 함께 말이다.
믿을 수 없었다. 한달 전 입사를 압둔 졸업생 두 명이 우리 프로젝트 인턴으로 합류했었다. 그날 오후만 하더라도 난 그들에게 파워포인트와 엑셀 다루는 법을 알려주며 이런저런 조언을 건냈다. 겨우 몇 개월이지만 선배로서 너스레도 떨었다. 그런데 그들과 동기로 입사하는 상황이됐다.
주위에선 벌써 몇 일 전부터 입사 턱을 내라며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입사하려면 앞으로 3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치미는 울화에 속은 몽글했고 창촐간에 헛숨이 새어나왔다. 애면글면 버텨온 시간들은 의미를 잃고 퇴색했다. 와락, 면은 일그러졌다. 정상무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보고가 잘 끝나긴 했어요. ‘차세대 IT전략’ 프로젝트를 저희가 도맡아 하게 됐으니까요. 그런데 혁신실에서 프로젝트를 발주할 명분으로 이번 프로젝트 목적을 ‘전사 IT진단’으로 공식적으로 바꿔야 한대요. 그러면 계약 변경이 필요한데 연말이잖아요. 예산이 동결되서 ‘차세대 IT전략’ 프로젝트와 통합 계약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버렸죠.
그러니까 내년 3월까지 우리 프로젝트는 공식 프로젝트가 아닌 셈이에요. 회사 차원에서 투자로 생각하고 비용을 쓰고 있는 상황인거죠. 그래서 프로젝트 예산으로 특채 입사를 진행하는 건 어렵게 됐어요.
세윤 씨가 이해 좀 해주세요. 3월에 공채로 입사하면 프로젝트 예산하곤 상관없이 입사가 가능하니까 너무 걱정은 마세요. 이미 인사과하고는 다 얘기 됐으니까요.”
정 상무는 나를 회유하면서도 한편으론 몽니 좀 그만 부리라는 듯 쏘아봤다. 입사 날짜가 지연된 건 사실이지만 취소가 된 것도 아니고 고작 3개월 지연 된 건데 뭐가 문제 냐는 눈치였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공채 입사 예정일은 3월 2일 이었으니 실제 지연된 건 2개월에 불과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에게 그 2개월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