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전사 IT진단 (5)

by 성세윤

그날 밤 퇴근하던 치수를 불러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치수를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당연히 정사원 인터뷰일 거라 생각했는데 고작 인턴 자리를 알아봐 준 거란 사실을 깨닫고 만감이 교차했다. 자존심엔 큰 생채기가 났다.


치수와는 대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면서도 늘 경쟁하던 사이였다. 그래서 정사원으로 전환되기 전까진 치수를 안 볼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그날은 누군가와 얘기를 해야 했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치수뿐이었다.

내 긴 넋두리를 듣고 있던 치수는 그만하라는 듯 질문 하나를 던졌다.


“넌 정말 특채를 기대했던 거니? 정 상무가 이렇게 될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차세대 IT 프로젝트가 얼마짜리 프로젝트인지 알아? 300억이야. 그런 프로젝트를 수주하는데 정 상무 그 빠꼼이가 예산계획 하나 제대로 안 세웠겠어? 정 상무는 애초부터 특채를 고용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프로젝트 인원도 인턴으로 메꿨다면서. 몇 개월 지연될 걸 감안해서 예산 안배를 그렇게 했겠지. 운영모델 혁신 프로젝트는 포기하고 차세대 IT 프로젝트에 올인할 계획이었단 얘기야.”


“그건 아니야. 정 상무도 혁신실에서 지침이 내려와 방향을 바꾼 거지 처음부터 차세대 IT프로젝트를 염두에 뒀던 건 아니었어.”


“넌 공부는 그렇게 잘했으면서 이런 건 왜 이리 느리냐? 혁신실에서 말이 나온 것도 정 상무가 다 뒤에서 작업을 했으니까 얘기가 나온 거지. 김호식 전무나 임수민 이사나 다 한패라고.


300억짜리 프로젝트면 1년 치 IT 예산을 쥐고 흔드는 건데 김호식 전무가 그걸 IT본부에서 가져가게 그대로 두겠어? 혁신실에서 대놓고 차세대 IT프로젝트를 하겠다고 덤비면 IT본부에서 반발할 게 뻔히 보이니까 일단은 운영혁신 전략으로 프로젝트를 띄우고 방향을 바꾼 거겠지.


대기업에서 컨설턴트를 왜 고용하는데. 자기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그걸 직접 못하니까 컨설턴트를 고용해서 하게 하는 거야. 논리나 인사이트 같은 미사여구로 치켜세워주지만, 사실은 자기 하고 싶은 얘길 대신하게 하는 거라고. 정 상무가 김호식 전무 의중을 정확히 파악해 처음부터 그렇게 기획한 거란 말이지.”


정 상무가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정 상무가 그럴 계획이란 걸 짐작했다면 치수도 알고 있던 걸까? 내가 쉽게 정사원 전환이 안될 거란 사실을 말이다. 입사에 대한 확신도 없이 수개월 동안 인턴으로 굴러보라고 날 이 자리에 추천했던 걸까?


문득 대학 때 기억이 떠올랐다. 치수와 나는 문과생들 사이에서 악명 높던 ‘서구문명의 역사’ 수업을 함께 들었다. 필수과목도 아니던 나는 최종 에세이 과제에서 50명이 넘는 청강생 중 단 한 명에게 주는 A+를 받았다. 족보까지 구했으면서 나보다 못하면 어떡하냐 비꼬던 나에게 치수는 버럭 화를 냈다. 카페테리아에서 격분하며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식판에 있던 생태찌개까지 엎어졌었다.


그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전공과목도 아닌데 치수를 이겼다는 승리감과 늘 웃는 얼굴로 속내를 감추던 그의 본색을 드러냈다는 만족감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쾌감을 지금 치수도 느끼고 있을까? 지금이라면 입사도 못한 인턴과 과장 진급을 앞둔 자신과의 신분차를 즐기고 있을 테니 말이다.


“넌 그걸 알면서도 날 추천했던 거야?”


나는 달뜬 취기를 참지 못하고 지탄하듯 물었다. 치수는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술잔을 쾅하고 내려놓았다.


“그걸 아니까 추천한 거지!”


그런 자리였으니 내가 면접이라도 볼 수 있었다는 말을 치수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난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내 현실이었다.


치수는 열을 식히려는 듯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됐다. 미안하다. 기분도 꿀꿀할 텐데. 그래서, 어떡할 거야? 그만 두기라도 할 거야?”


그래, 이 따위 거 정말 그만둬 버릴 거야!


나는 치수를 쳐다보지 못하고 머릿속으로만 말했다. 인턴 경력을 이용해 어센트보다 훨씬 좋은 직장을 얻을 거라고, 보란 듯 맥킨지, 아니 골드만삭스 같은 곳에 취직할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 없이 프로젝트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보자고,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내일부터 업무가 마비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입사 오퍼를 받을 수 있는 곳은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센트에 하루라도 빨리 입사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나는 2개월 후 어센트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지난 몇 개월간 일한 건 단순 인턴활동으로 내 프로필 참고사항에 기록됐을 뿐 공식 경력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한동안 난 정 상무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에라도 단 둘이 타게 될까 그의 위치를 확인했고, 식사 시간 때도 그와 둘이 남게 되면 재빨리 샌드위치를 사 와 자리에서 때워 버렸다.


달라진 건 정 상무도 마찬가지였다. 최종보고 후 업무가 줄자 나에게 직접 업무 지시를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더 이상 잡무도 시키지 않았다. 상황이 그리 되니 정 상무가 의도적으로 나를 피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입사를 빌미로 내 노동력을 착취한 데 대한 죄책감이었을까?


어찌 보면 정 상무는 프로젝트 담당자로서 최상의 결과를 추구했을 뿐이다. 수 백억짜리 프로젝트가 목전에 있다면 갖은 권모술수를 동원해서라도 거머쥐는 게 옳았다. 당장 십억짜리 프로젝트를 희생해서라도 말이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최종발표가 어중간히 끝났다면 왜 운영모델 프로젝트에서 IT를 운운하냐는 힐난 만이 올곧이 그의 몫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 정 상무는 위험을 감수하며 도전했고 내 입사 연기는 그 도전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의도적으로 내 입사를 방해한 것도 아니고 나를 골탕 먹이려 프로젝트 목표를 바꾼 것도 아니었다. 모든 건 이윤과 효율 극대화를 추구하는 비즈니스 세계의 법칙에 따라 발생한 결과였다.


한 과장과의 관계도 변했다. 최종보고 후 데면데면해진 그의 행동에 처음엔 내 입사 지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됐다. IT 비용분석을 맡기고 ‘시험’을 운운하며 잔뜩 기대감을 부축인 게 본인이니 도의적 책임은 느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얼마 뒤 뒤늦게 알게 됐다며 정사원 입사를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그의 모습에선 일말의 가책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역시 내 입사를 ‘지연’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관계가 소원해졌던 건 업무량이 줄며 자연스레 같이 일하는 시간이 줄었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실로 수개월간 함께 밤을 새우고 논쟁을 펼치며 끓어올랐던 관계가 식는 건 순간이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인간관계란 이윤 추구라는 보편 법칙에 따라 수시로 재조합되는 기계적 과정의 부산물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어찌 이리 깊은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지 신통했는데 허울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비즈니스 세계의 모든 게 허상이었다. 감가상각과 같은 개념도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는, 문서상에만 존재하는 비용이었고 기업의 경영 성과를 판단하는 주요 회계문서인 손익계산서, 현금흐름표, 대차대조표 같은 재무제표의 많은 항목들이 그랬다. 결정적으로 모든 비즈니스의 근간을 이루는 ‘화폐’란 것도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하나의 가치판단 체계에 불과하지 않던가!


도대체 이 거대한 허구의 세상에 진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난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고 세상과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걸까?


일순 섬쩍지근한 한기가 전신을 감싸돌았다. 지난 반년 간 새로운 세상과 조우해 나름 이치와 작동 원리를 파악하고 그 구성원들과 교류하며 믿음과 정도 생장했다고 생각했다. 헌데 이 모든 게 미몽일 따름이었다. 내가 조우한 세상은 여전히 어둑시니 같은 미지의 존재였다. 웃자라버린 암흑의 세계는 손가락 한 번만 갖다 대도 역한 진물을 토해내며 게저분히 흐므러졌다. 이치도 믿음도 정도 한낱 신기루일 따름이었다.



한참 간 격탕하던 심화가 침잠하고 침정이 찾아올 때쯤 문득 고개를 든 건 신묘한 각성이었다. 진정 비즈니스란 허구에 불과한 걸까? 비즈니스 세계에는 회계 용어와 같은 새로운 언어도 있었고 이윤이나 효율 최적화와 같은 생소한 법칙도 있었다. 그 언어와 법칙에 기반해 인간과 인간은 억변의 관계를 맺었다. 언어도, 법칙도, 관계도 허구에 불과했지만 그게 실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사람들은 허구에 불과한 재무제표 항목에 기반해 가치평가를 하고, 주식을 매매한다. 주가 상승으로 증가한 기업가치가 잉여 현금을 창출하며 기업의 투자활동을 돕는다. 허구지만 허구로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 현실을 변화시킬 힘을 자아내는 것이다.


힘의 소용돌이는 행동뿐만 아니라 지각과 감각도 만들어 냈다. 덧없이 사라지긴 했지만 정 상무가 내 입사를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나, 한 과장과 선임, 후임의 관계를 넘어선 동료애로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은 다분히 실재였다. 그 믿음과 느낌 덕에 난 며칠 밤을 새우며 파워포인트와 엑셀을 잡고 씨름할 수 있었다.


허구로부터 실재를 연성하는 힘! 이거야 말로 비즈니스의 본질은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절대반지의 부름처럼 간교한 목소리가 날 선혹하듯 울렸다.


힘을 원하는 가?


물론이다! 힘을 원했다. 내가 비즈니스 세계에서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정 상무의 간교한 수작이나 한 과장의 허울뿐인 친교에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싶었다. 세상에 휩쓸리거나 기류에 편승하는 게 아니라 변화를 주도해야 했다. 그러려면 이 세계의 언어와 법칙을 익히고, 이치를 체득하는 게 우선이었다.


입사를 앞두고, 나는 몇 개월 전 고시원 방을 얻었던 그날처럼 앙칼지게 다짐했다. 이 이질적인 비즈니스 세계의 법칙을 통달해 나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보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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