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미래 TV서비스 전략 (2)

by 성세윤

국내 굴지의 전자기업 계열사인 디맥스는 북미 시장에서 2위, 세계 시장에서 3위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셋톱박스 (STB, set-top-box) 제조사다. 그들은 컴캐스트 (Comcast) 등 대형 케이블 TV사와 협력체계를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성장해 왔다.


작금엔 인터넷을 통해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주문형 비디오 서비스 업체인 넷플릭스 (Netflix)나 인터넷도 이용 가능한 스마트 TV, 인터넷을 통해 제공되는 양방향 TV 서비스인 IPTV 등 초고속 인터넷망을 기반으로 하는 인터액티브 TV (interactive TV) 서비스가 나오며 시장이 어떻게 변화될지 주시했다.


일부는 케이블 TV 사업 비중이 큰 디맥스의 위기로 보았고, 일부는 이제 갓 태동하는 인터액티브 TV 시장을 개척해 시장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 기회로 봤다. 미래 TV서비스 시장은 어떻게 진화할 것이며 디맥스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에는 인터액티브 TV라는 개념의 명확히 정의도 없고 배경정보도 부족했다. 우리 팀은 우선 기존 방송 서비스인 트래디셔널 TV와 인터액티브 TV의 차이점을 정의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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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디셔널 TV는 방송을 채널 단위로 나눈 뒤 특정 주파수의 전파로 변환해 송신한다. 예를 들어 방송 주파수 대역이 600 MHz에서 650 MHz라면 10개의 채널을 각각 5 MHz단위의 주파수에 할당하여 송신하는 식이다.


전파는 대기 혹은 케이블 망을 통해 전송되며 이를 가정에서 TV 안테나나 셋톱박스에서 수신해 방송을 볼 수 있다. 대기를 통해 전송되면 지상파 TV, 케이블을 통해 전송되면 케이블 TV다. 우리는 그 두 가지를 트래디셔널 TV라 정의했다.


반면 인터액티브 TV는 방송을 패킷(packet) 단위 데이터로 변환해 전송한다. 따라서 개별 방송채널을 지정된 주파수로 전송할 필요 없이 임의의 주파수를 선택해 전송할 수 있다. 한 채널을 다수 주파수로 나누어 송신할 수도 있고 채널 단위가 아닌 프로그램 단위로 나누어 송신할 수도 있다. 트래디셔널 TV의 전송방식이 지정된 레일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기차와 같다면 인터액티브 TV는 차선을 바꾸며 갈 수 있는 자동차와 같다.


이런 차이점은 사용자 경험에 큰 영향을 준다. 서비스 다양성은 단연 인터액티브 TV가 우수하다. 트래디셔널 TV에서는 시청자가 어느 채널을 시청할 것인가만 선택할 수 있다. 반면 인터액티브 TV에서는 어느 채널의 어느 프로그램을 시청할지, 더 나아가서는 어느 부분을 시청할지까지 선택할 수 있다.


수신 안정성 측면에서는 트래디셔널 TV가 우수하다. 인터액티브 TV에서는 데이터 패킷이 전송 중 손실될 가능성도 있고 망에 과부하가 걸리게 되면 전송이 지연될 수도 있다. 하지만 트래디셔널 TV는 각 채널 별로 주파수가 지정되어 있어 항상 안정적으로 일정 품질의 방송을 수신할 수 있다. 영화처럼 상영시간이 길고 고화질을 요구하는 콘텐츠를 시청하기에는 트래디셔널 TV가 유리하다.


당시까진 인터액티브 TV에 대한 인지도도 낮았고, 고화질 방송 수신이라는 트래디셔널 TV의 장점도 있었기 때문에 트래디셔널 TV가 우위였다. 하지만 데이터 전송 기술이 발전해 트래디셔널 TV 수준의 품질과 안정성을 갖춘 인터액티브 서비스가 등장하면 시장이 어떻게 진화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중장기적으로는 이 두 서비스가 혼합된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디맥스의 포지셔닝 및 대응전략은 이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판단됐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2주쯤 지난 어느 날 새벽이었다. 일주일 간 눈이 빠지도록 인터넷을 뒤지고 시장조사 자료와 증권사 리포트를 정독했다. 화이트보드 꼭대기엔 큼지막히 ‘미래 TV서비스 시장의 진화’란 타이틀이 쓰여있었고 그 밑으론 수없이 쓰고 지운 보드마커 자국과 말라비틀어진 마커 찌꺼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일주일 뒤면 디맥스 담당 임원과 시나리오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중간보고를 진행해야 했다. 나는 침을 튀겨가며 임정혁 부장에게 사업자 별 시장점유율부터 인터액티브 서비스에 대한 수요조사 결과, 기술 동향, 사용자 경험 자료까지 정리해 만든 시나리오를 설명했다.


“현재 인터액티브 TV 서비스라고 할 만한 건 인터넷 TV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작년 닐슨에서 조사한 시청시간 점유율을 보면 15% 정도인데… 유튜브나 케이블 방송의 VOD (Video On Demand) 서비스 성장 덕분에 40% 이상 사용자들이 인터액티브 TV 서비스를 사용해 본 경험이 있고… 전송 품질은 QoS (Quality of Service)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면서…”


“그래서, 결론이 뭐죠?”


말이 늘어지자 임 부장이 날카롭게 치고 들어왔다. 너무 장황하게 말했나? 나는 말을 멈추고 임 부장의 눈길을 피해 좌우로 눈동자를 굴렸다. 임 부장은 멋쩍었는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끊어서 미안해요. 일단 끝까지 얘기해 보시죠.”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더듬더듬 겨우 말을 끝마쳤다. 임 부장은 재차 질문을 던지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임 부장이 다시 입을 열기까진 10분 남짓 무지근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할 것 같네요.”


울컥, 심중에서 무언가가 치받았다. 점심때 이제 시나리오를 정리하자는 임 부장 말에 저녁이면 작업이 끝날 거라 생각했고, 저녁엔 그래도 12시 전엔 끝나겠지 했었다. ‘처음부터’란 말에 드는 생각은 과연 오늘 집에 갈 수 있을까였다.


“네?”


나는 여감을 잔뜩 담아 못 들은 척 되물었다. 임 부장은 아랑곳 않고 심드렁히 날 쳐다볼 뿐이었다.


“처음부터 다시요. 이거 가지곤 안 돼요.”


“어젠 이 정도면 된 것 같다고...”


이대로 지긴 싫었다. 임 부장과는 어제 새벽까지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수 십 번 반복해 리서치 결과를 논의했다. 그런 논의 끝에 나온 시나리오였는데 처음부터 다시라니.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그랬죠. 리서치는 잘했어요. 문제는 시나리오예요. 우린 리서치 회사가 아니에요. 컨설턴트 역할이 고작 리서치 자료를 요약하는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입니다. 세윤 씬 컨설턴트처럼 생각하는 법부터 훈련받아야겠어요.”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임 부장 말에 비웃음이나 조롱이 섞여 있었다면 화라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임 부장은 흉곡에 품은 팩트를 아무런 필터 없이 술술 털어낼 뿐이었다. 거기엔 어떤 감정이나 편견도 섞여 있지 않았다.


‘도대체 컨설턴트처럼 생각하는 법이 뭡니까?’ 나는 눈씨로 물었다.


“세윤 씨가 리서치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알아요. 아마 시간이 더 있었다면 더 많은 팩트를 찾아낼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런다고 시나리오가 나올까요?”


“…”


“애널리스트한테 이런 질문을 하면 보통 아는 게 부족하고,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답 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답은 팩트에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린 시장이 어떻게 변화될지 예측하고 싶은 것이지 현재 시장이 어떻다는 걸 서술하고 싶은 게 아니거든요.


현재의 팩트가 미래를 예측하는 단서는 될 수 있지만 답이 될 순 없어요. 문제해결을 위한 본질적인 역량은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 상상력이죠. 세윤 씨는 몰라서 답을 못하는 게 아니라 답을 상상하는 훈련이 안되어 있는 거예요.”


“답을 상상하는 훈련이요?”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답에 대한 경우의 수는 몇 가지 되지 않아요. 미래 TV서비스 시장의 변화란 결국 인터액티브 TV와 트래디셔널 TV 중 어떤 서비스가 주류 서비스가 될 것이냐의 문제고, 디맥스의 대응방안이란 영업과 협력 관점에서 케이블 TV 사업자와 인터액티브 TV사업자 간 어디에 집중하겠느냐의 문제거든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도 여기서 바로 답을 낼 수 있어요. 배경지식이 전혀 없더라도 말이죠. 아니, 아직 증명된 답은 아니니 그걸 가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임 부장은 마커펜을 들고 화이트보드에 가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회의실 테이블에 걸터앉아 보드를 바라봤다. 대한통신 프로젝트에서 임정혁 부장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그는 회의 때 보드를 사용해 내용을 정리하길 좋아했다. 말로 하는 것보다 이해하기 쉬웠고 무엇보다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 간 쉽게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습관화하고 싶은 기술 중 하나였다.


검센 직언으로 너덜너덜해진 심경을 추스르는 사이 임 부장은 정리를 끝냈다.


인터액티브 TV는 TV의 부수적 기능에 머물 것이며 디맥스는 현재 케이블 TV사업자들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조금 살을 더해볼까요?”

화이트보드를 보던 임 부장은 방금 쓴 가설 옆에 좀 더 정교한 가설을 썼다.


인터액티브 TV는 TV의 부수적 기능으로 자리 잡을 뿐 트래디셔널 TV주도의 시장구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디맥스는 케이블 TV사업자들이 인터액티브한 기능을 구현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협력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vs’라고 쓰더니 그 옆에 반대되는 가설을 썼다.


모든 미래 TV서비스는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고 트래디셔널 TV사업자들은 몰락할 것이다. 현재 제조업만으로 성장에 한계를 겪고 있는 디맥스는 태동기인 인터넷 TV 시장에 서비스 제공자로 진입하여 새로운 성장동력을 키워야 한다.


임 부장은 ‘협력체계 강화’와 ‘서비스 제공’을 굵게 쓰며 밑줄을 그었다. 하나는 현재 구도를 유지하며 협력체계를 강화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 서비스를 하며 현 파트너사들과 경쟁에 나서겠다는 얘기였다. 명확히 대비되는 전략이었다.


임 부장이 즉석에서 만들어낸 시나리오는 내가 일주일간 밤을 새우며 만든 시나리오보다 훨씬 간결하고 직관적이었다. 두 번째 시나리오에는 디맥스가 직접 서비스 제공자로 시장에 진입한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첨부했다.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논쟁은 해볼 만했다.


“꼭 길고 자세히 설명해야 답이 되는 게 아니에요. 결론부터 치고 나가는 것도 방법이죠. 이렇게 가설부터 내세우면 상대가 “왜?”라고 묻겠죠. 이것도 일반적인 상식과 로직에만 기반해서 충분히 답할 수 있답니다. 추가 정보가 없어도 말이에요. 생각을 전개시켜 보죠.


첫 번째 가설은 트래디셔널 TV 사업자 위주의 시장구도가 유지된다는 거예요. 왜 시장구도는 바뀌지 않을까요? 시장구도가 바뀌지 않는다는 건 시청자들이 방송 매체를 소비하는 형태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의미해요.

인터액티브 TV에서는 방송을 능동적으로 소비하죠. 자신이 원하는 콘텐츠를 선택하고 그것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부분만 선택해 소비해요. 선택의 폭은 넓지만 어떻게 보면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피로감을 줄 수 있어요.


반면 트래디셔널 TV는 선택의 폭은 좁지만 수동적으로 상영되는 콘텐츠를 즐길 수 있어요. 이렇게 보면 ‘선택권’과 ‘피로도’라는 두 가지 요소 중 어떤 요소를 시청자가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답을 낼 수 있죠. 선택권이 중요하다면 인터액티브 TV가 주류가 되는 것이고 피로도가 중요하다면 시장구도는 유지되는 거예요.


이제 ‘선택권’이란 관점에서 조금 더 고민을 해보죠. 트래디셔널 TV가 인터액티브 TV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택의 폭이 좁기는 하지만 채널이 100개가 넘고, 영화채널, 스포츠채널 등 전문화된 채널이 다수인 상황에서 선택의 폭이 좁다고 할 수 있을 까요?


또한 채널에서 방영되는 콘텐츠는 분야별 전문가가 수많은 콘텐츠를 검토하고 선별한 거예요. 채널을 선택한다는 건 전문가가 검토한 수 천 개의 콘텐츠 중 하나를 선택한 것과 같죠.


반면 인터액티브 TV에서 콘텐츠를 선택한다면 그건 내가 직접 검토할 수 있는 수십 개, 많아야 수백 개의 콘텐츠 중 하나에 불과해요. 인터액티브 TV서비스 초기에는 콘텐츠의 ‘직접’ 선택이 매력적으로 어필될 수 있겠지만, 선택에 따른 피로도 증가와 채널이라는 매력적인 ‘대체’ 선택권을 생각할 때 이것이 시장구도의 변화를 초래할 만큼의 파급력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죠. 이 주장이 바로 우리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명제가 됩니다.


검토해야 할 사안은 하나 더 있어요. 세윤 씨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터액티브 기능 외에 서비스 품질이라는 중요한 변수가 있어요. 만약 패킷기반의 전송 방식을 통해 트래디셔널 TV와 같은 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인터액티브 TV 사업자가 채널 서비스를 대폭 강화해 트래디셔널 TV 사업자를 위협할 수도 있겠죠.


이렇게 되면 인터액티브 기능이 부가적 기능에 머문다는 사실은 변함없을지 몰라도 시장 주도권에는 큰 변화가 생겨요. 디맥스의 대응방안은 트래디셔널 TV사업자에게 인터액티브 기능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액티브 TV 사업자에게 채널 서비스를 지원하는 것이 되고요. 고객이 바뀌고 마케팅도 바뀌며 개발해야 하는 제품도 바뀌는 거죠.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렇게 될 가능성이 크진 않아요. 특히 디맥스의 주요 타깃 시장인 북미에선 더욱 그렇죠. 컴캐스트처럼 트래디셔널 TV 사업자가 인터넷 사업 또한 겸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트래디셔널 TV 사업자, 즉 인터넷 사업자는 인터넷으로 TV서비스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대역폭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들어 인터액티브 TV사업자들의 인터넷 속도를 제한할 수 있어요.


이러한 역차별을 막기 위해 망중립성(net neutrality)에 대한 규제가 논의되고 있기는 하지만 결과는 불분명하죠. 최소 향후 2, 3년까지는 인터액티브 TV사업자를 견제할 수 있을 거예요.”


사고의 차이가 극명히 느껴졌다. 나는 팩트를 찾기 바빴는데 임 부장은 팩트를 구조화하고 구조화된 팩트를 기반으로 시장진화 시나리오를 예측했다.


중요한 건 시나리오의 목적성이었다. 임 부장은 철저히 디맥스 관점에서 시나리오를 풀었다. 예를 들면 인터액티브 TV 가 성장하며 현재 트래디셔널 TV 사업자 중심의 경쟁구도가 바뀔지, 디맥스 같은 사업자에게 서비스 사업기회가 얼마나 생길지 같은 내용들 말이다.


내가 수집된 정보에만 기반해 시나리오를 작성했다면 임 부장은 관객을 고려해 관객이 어떤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 지를 먼저 고민했던 것이다. 그렇다. 임 부장의 시나리오에는 디맥스가 취할 행동에 대한 메시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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