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후 신입사원들은 ‘대기발령’ 상태로 남았다. 모두들 어떤 프로젝트에 투입될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첫 프로젝트에 따라 입사할 부서도 결정됐기 때문이다.
어센트 조직은 크게 통신/전자, 제조, 금융 등 산업별 조직과 전략, 고객관리 (CRM,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공급망관리 (SCM, Supply Chain Management), IT 등 기능별 조직으로 나뉘었다. 신입사원들은 첫 6개월간 수습기간을 거치며 어떤 부서에 지원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습기간 중 투입된 프로젝트 부서에 그대로 발령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 지망 1순위는 전략조직이었다. M&A나 신사업처럼 전략에서 다루는 프로젝트에 관심이 갔고, 임정혁 부장과의 강렬했던 첫 만남도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략은 어센트 사 내 가장 작은 조직이었다. 워낙 뽑는 사람이 적었고, 신입사원들 중 이미 내정된 사람도 있어 단번에 전략에 갈 확률은 희박했다.
나는 오히려 기피 일 순위였던 IT 부서로 배치될 가능성이 높았다. 대한통신에서 이미 굵직한 IT 프로젝트를 했기 때문이었다. 치수는 어쩌자고 전략을 놔두고 IT 담당인 정주성 상무에게 내 이력서를 건넨 걸까?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동기들이 하나둘씩 프로젝트에 투입되기 시작할 무렵 신입사원이 대기하던 회의실에 달가운 얼굴이 보였다. 임정혁 부장이었다. 신입사원 트레이닝 겸 자신이 맡은 ‘미래 TV서비스’ 프로젝트 소개를 위해 왔다고 한다. ‘미래 TV 서비스’ 프로젝트는 주문형 비디오와 같은 신규 영상 서비스 등장에 따른 TV 시장 진화방향과 클라이언트의 사업전략을 도출하는 게 목표였다.
임 부장은 간단한 소개 뒤 구인공고를 내듯 프로젝트에 투입할 주니어 한 명이 필요하다고 공표했다. 신입사원들 눈동자가 제가끔 총기를 발했다. 자리는 하나, 남은 인원은 10명이었다.
서로를 할끔거리는가 싶던 눈씨는 전순간 혈기 방장한 야욕으로 불타올랐다. 성마른 동기 몇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며 무작스레 읍소했고 좀 더 반지빠른 몇몇은 TV시장이나 기술에 대해 물으며 에둘러 관심을 표했다. 아예 임정혁 부장에게 관심의 살을 날린 동기도 있었다. 첫사랑 얘기를 해달라 조르듯 첫 프로젝트 경험을 얘기해 달라며 말이다.
이건 나에게도 기회였다. 검세게 치고 나가야 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임 부장이 서 있던 보드 앞으로 갔다. ‘휴. 뭘 하겠다고 저러는 거야.’ 깨죽대는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상관없었다. 내 시선은 임정혁 부장과 그가 달고 있던 ‘전략’이란 타이틀만을 향했다. 보드 앞에 선 나는 마커펜을 꺼내 들고 대한통신 프로젝트 첫날 임정혁 부장이 나에게 그려줬던 트리차트를 그대로 그렸다.
“현재 TV 서비스는 지상파나 케이블 같은 종합편성 채널 서비스와 홈쇼핑처럼 특화된 채널 서비스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에는 주문형 비디오를 비롯해 다양한 인터넷 기반 서비스들이 TV에서 제공되면서 서비스 경쟁구도가 바뀔 것 같습니다.
현재 주류가 되는 채널 서비스의 비중은 축소되고 새로운 경쟁 서비스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프로젝트 핵심은 이렇게 변화하는 시장구도에서 클라이언트가 어떻게 포지셔닝할지가 될 것 같습니다.”
제대로 먹혔다. 말이 끝날 때쯤 꽉 죄어 놓았던 긴장이 풀리며 숨이 가빠지고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그런대로 잘 해냈다. 임정혁 부장은 경쟁구도의 진화를 요약하기 괜찮은 프레임워크라는 칭찬을 던지며 트리차트를 기준으로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동기들은 놀라움과 질투가 반쯤 섞인 눈초리로 보드를 일견 했다. 그 뒤 몇몇 동기들이 신입사원이라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날카로운 코멘트를 첨언했지만 승자는 화두를 던졌던 나였다. 프로젝트 소개가 끝난 임 부장은 회의실을 나가며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려 힘껏 그러쥐어줬다.
임정혁 부장이 언제 날 불러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 그리곤 다시 하나둘씩 남은 동기들이 다른 프로젝트에 투입됐고 결국 나는 혼자 대기 상태로 남게 됐다. 이건 뭐지 하는 생각에 등골이 싸해졌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인사과에 전화를 걸었다.
“성세윤 님이요? 잠시만요. 아, 사우 님은 이미 요청 온 프로젝트가 있네요. 아마 이번 주 중으로 통보 갈 거예요.”
그럼 그렇지.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될 걸 괜한 걱정을 했다. 그래도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네. ‘미래 TV 서비스’ 프로젝트 맞죠?”
“아니요. 대한통신 ‘차세대 IT 전략’ 프로젝트예요.”
“네?”
“어머, 모르고 계셨어요? 사우 님 프로젝트는 입사 때부터 정주성 상무님이 요청해 놓으셨는데요.”
“정주성 상무님이요?”
무지근한 둔통에 전신이 저릿했다.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았다. 정 상무가 선수를 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내 입사를 지연시켰으면서 어찌 뻔뻔하게 ‘차세대 IT 전략’ 프로젝트에 날 투입할 생각을 했을까?
‘전략’이란 단어가 붙어있긴 하지만 ‘차세대 IT전략’ 프로젝트는 대한통신 시스템의 아키텍처를 분석하는 전형적인 IT 프로젝트였다. 이마에 ‘IT 전문가’란 주홍글씨를 큼지막히 삽자할 판이었다. 주먹이 불끈 악쥐어졌다. 도살장에 끌려갈 소처럼 눈만 껌뻑댈 수는 없었다.
단박에 이메일 세 통을 썼다. 우선 정 상무에게 대한통신 프로젝트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항변했다. 입사 지연에 대한 업화를 함빡 실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직설했다.
임 부장에게는 함께 일하고 싶다고, 전략 부서에 가고 싶다고 썼다. 대한통신 프로젝트 때 내가 했던 일을 세세히 기록했고, 그게 어떻게 전략 업무에 도움 될지 논증했다.
마지막 메일은 인사과에 썼다. 첫 프로젝트로 IT 프로젝트를 하긴 했지만 다른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IT로 커리어를 키우고 싶지 않다고 오금을 박았다.
내가 지금 정 상무 등에 칼을 꼽고 있는 건가? 메일 발송하려니 잠시 손이 머뭇거려졌다. 당장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 그도 인력이 필요하긴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쭙잖은 배려심 따위는 잡귀를 벽사하듯 떨궈버렸다. 내 진로를 개척하는 건 올곧이 내 몫이었다.
그 뒤로 정주성 상무, 임정혁 부장 그리고 인사과 사이 어떤 얘기가 오고 갔는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정확히 이틀 뒤, 난 임정혁 부장에게 미래 TV 서비스 프로젝트 클라이언트인 디맥스 본사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얼마 뒤엔 한호진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다른 프로젝트로 가는 게 맞냐고, 대한통신 프로젝트에 인력이 부족한데 도와줄 순 없냐며 조심스레 물었다. 내 첫 사수였기에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결심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생존과 생장을 위해선 몰강스레 치달려야 했다.
허겁지겁 사무실을 나오다 하필 정주성 상무와 마주쳤다. 그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았지만 앙다문 입술 사이 감춘 불편함은 추슬러지지 않았다.
그와 옷깃이 스칠 때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 째는 전략 컨설턴트로서 내 길을 감에 있어 이제 그와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고, 둘 째는 그럼에도 기회가 된다면 그가 날 가장 필요로 할 때 철저히 그를 배신해 주겠다는 속다짐이었다.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의도로 내 입사를 지연시키고 끝까지 내 발목을 검잡으려 한 빌런에게 그 정도 앙갚음은 해줘야 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