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미래 TV서비스 전략 (3)

by 성세윤

“그럼 정리를 해 볼까요?”


임 부장은 마커펜을 들고 한 글자씩 정갈하게 써 내려가며 ‘트래디셔널 TV 사업자 중심의 시장진화’라는 가설을 정리했다. 미래 TV의 진화방향을 시청형태, 기술, 경쟁 등 다양한 관점의 명제로 뒷받침하자 자연스레 가설과 명제가 트리(tree) 구조를 이뤘다. 내가 두서없이 늘어놓았던 리서치 결과가 순식간에 구조화되며 ‘이슈트리’(issue tree)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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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슈트리’라고 합니다. 이슈트리의 출발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가설이에요. 팩트가 아닌 가설에 초점을 맞추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방법이 바뀌죠. 팩트에 초점을 맞추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 인터뷰를 하고 리서치 자료를 읽는 등 남의 생각을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요. 세윤 씨가 지난 일주일간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가설에 초점을 맞추면 내가 예상하는 답은 무엇인지, 왜 그것을 답이라 추정하고 그 답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 등 생각을 정교화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게 돼요. 전자는 지식을 쌓게 되지만 후자는 생각하는 법을 훈련하는 거죠.


역량이 쌓이면 생각의 전체 구조가 보여요. 분석이 포괄적으로 진행됐는지, 또 분석항목들이 중복 없이 상호배타적으로 분류됐는지 확인할 수 있죠. 이걸 컨설팅 용어로는 미씨 (MECE, 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라고 한답니다. 빈틈없이 모든 항목을 포함하면서도 두서없이 늘어놓는 게 아니라 체계적으로 간결하게 구조화하는 거죠.”


깔끔했다. 시장이 왜, 그리고 어떻게 트래디셔널 TV 사업자 중심으로 진화할지 한눈에 들어왔다.


“자, 그럼 이걸 시나리오로 만들어 볼까요?”


임정혁 부장은 손에 쥐고 있던 마커펜을 훽 돌려 나에게 내밀었다. 시나리오라, 뭘 말하는 걸까? 나는 마커펜을 받아 들고 테이블에서 내려와 보드 앞에 섰다. 임정혁 부장의 말을 듣고 머릿속에선 모든 게 정리된 듯했는데 막상 보드 앞에 서니 머리가 하얘졌다. 임 부장은 시작해보라는 듯 보드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니까 미래 TV 서비스가 진화하는 방향은 크게 두 개 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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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시장 진화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 중 영향력과 변화의 폭이 큰 2개의 요소를 정의했다. 이 두 요소를 기반으로 진화 프레임워크를 만들 수 있었다. 한 축은 인터액티브 기능의 경쟁력이었고, 다른 한 축은 품질 (QoS, Quality of Service)이었다.


인터액티브 기능의 경쟁력은 소비자들이 얼마나 빠르게 인터액티브 기능에 적응하고 수요가 발생하느냐에 대한 문제였고, 인터액티브 TV 품질은 인터액티브 TV 사업자들이 얼마나 빠르게 경쟁력을 갖추고 트래디셔널 TV 사업자들을 견제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두 요소의 진화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트래디셔널 TV 사업자와 인터액티브 TV사업자 간 경쟁구도가 바뀔 수 있었다. 진화 방향을 결정하는 요인은 소비자들이 얼마나 빠르게 인터액티브 기능에 적응하느냐와 패킷 기반 인터액티브 TV의 품질이 얼마나 빠르게 보장되느냐 이 두 가지였다.


진화의 시작점은 자명했다. 현재 시장은 3 사분면에 있었고, 풀어야 할 건 진화의 방향성이었다. 나는 임 부장이 정리한 이슈트리를 참고해 진화 방향을 정리했다.


단기적으로 봤을 때, 콘텐츠 선택 등의 인터액티브 TV기능이 새롭긴 하지만 선별된 프로그램을 수동적으로 즐기는데 익숙한 시청자의 기존 행동양식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다. 또한 인터액티브 TV 사업자의 경우 향후 2-3년 간은 서비스 품질 때문에 고전할 것으로 예상됐다. 따라서 미래 TV서비스의 진화는 트래디셔널 TV 사업자가 시장 장악력을 유지하며 기존 채널 중심의 TV서비스에 인터액티브 기능을 추가하면서 시작될 것으로 예상됐다. 단기적으론 인터액티브 기능이 채널 서비스의 보완제 정도로 제공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인터액티브 TV의 품질 개선과 함께 채널 서비스를 포함한 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고 아마존, 구글 등 대형 인터넷 사업자도 적극적으로 시장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인터액티브 TV 사업자는 웹 기반의 혁신적인 기능을 제공하며 성장을 도모할 것이고, 트래디셔널 TV 사업자 또한 혁신 기능을 모방하며 그들을 견제할 걸로 예상됐다.


트래디셔널 TV 사업자의 시장 장악력이 어느 정도 유지되긴 하지만 경쟁구도가 형성되며 인터액티브 서비스 혁신을 유도하는 촉진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종국적으로는 트래디셔널 TV 사업자와 몇몇 대형 인터액티브 사업자 간 경쟁하며 다양한 TV 서비스가 제공되는 모습을 예상할 수 있었다.



“종합해 보면 시장 진화의 방향성은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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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혁 부장은 눈을 희번덕이며 보드에 그려진 장표를 일람했다.


“시장 초기엔 트레디셔널 TV 사업자 중심으로 진화하다가 장기적으로 인터액티브 TV 사업자와 경쟁구도가 형성된다는 거네요.”


“네. 콘텐츠 소비패턴이나 망 중립성 이슈를 고려하면 그럴 것 같습니다. 인터액티브 서비스 사업자에 의한 ‘파괴적 혁신’이 일어나기보다 트레디셔널 TV 사업자가 인터액티브 기능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거죠.”


“최종 진화 단계는 ‘하이브리드 TV’라고 하셨네요.”


“아직 구체적인 모습은 모르겠지만 채널과 인터액티브 서비스를 하이브리드 형태로 제공하는 서비스일 것 같습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할끔 임 부장을 일견 했다. 임 부장은 팔짱을 낀 채 화이트보드를 주시했다. 그의 무언은 전반적인 시나리오 방향성에 대한 동의와 추가 보완에 대한 필요성을 동시에 암시하는 듯했다.


“1번 단계에서 주도권은 트래디셔널 TV 사업자가 가지고 있겠죠?”


“네, 품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인터액티브 TV 사업자가 주도권을 가져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단기적으로 볼 때 주력 서비스는 여전히 채널기반 TV 서비스일 테니까요.”


“그럼 2번 단계, 그러니까 하이브리드 TV 시대의 시장 주도권은 누가 가지고 있을 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트래디셔널 TV 사업자의 주도권이 쉽게 전복될 것 같진 않지만, 2번에서는 상황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품질 문제만 해결되면 인터넷 기반 서비스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죠. 인터넷 기반 서비스의 가장 큰 장점은 스케일입니다. 케이블망을 이용한다면 서비스는 특정 국가로 제한될 수밖에 없어요. 망이 그렇게 깔려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터넷 망을 이용한다면 제한은 없어집니다. 물론 저작권이나 국가별 규제 같은 문제는 해결해야겠지만 이론적으론 전 세계에 서비스가 가능해져요. 다른 인터넷 서비스처럼요.


그렇게 되면 경쟁구도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어요. 지금처럼 중소형 업체가 아니라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대형사업자가 시장에 진입할 수 있죠. 넷플릭스 같은 사업자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고요. 그게 디맥스에겐 어떤 시사점이 있을 까요?”


“경쟁이 활발해지면 그만큼 서비스도 다양해지겠죠. 전체 시장은 더욱 커질 테고요.”


“맞아요. 하지만 시장 주도권을 잡게 될 사업자들을 생각하면 디맥스가 자체 서비스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어요. 대형 사업자들 사이에서 경쟁에 치이기만 할 거예요. 그럼 저희가 세웠던 가설 중 디맥스가 서비스 제공자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는 가설을 틀린 게 되겠죠.”


“반면에 인터넷 사업자와 경쟁 때문에라도 인터액티브 기능을 강화한 셋톱박스 수요는 증가하겠네요.”


“맞아요. 뿐만 아니라 인터넷 사업자들이 디맥스의 고객사가 될 수 있겠죠. 인터액티브 서비스에 특화된 셋톱박스 형 기기가 필요할 거예요. 이렇게 되면 첫 번째 가설이 맞긴 하는데 조금 수정을 해야겠네요. 단기적으로는 트래디셔널 TV 사업자와의 ‘협력체계 강화’에 집중해야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인터액티브 TV 사업자와의 ‘신규 협력체계 구축’도 중요해지겠어요. 재미있어지겠네요.”


합격이었다. 재미가 가슴에 푹 박혔다. 혼자 데이터를 수집하고 리서치 내용을 정리할 때는 몰랐는데, 임정혁 부장과 논쟁하며 팩트가 연결되고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니 실제로 ‘재미’란게 느껴졌다. 설명서도 없이 레고블록을 쌓아 멋들어진 성채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머릿속엔 변화무쌍 진화하는 시장의 모습과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하는 디맥스의 투쟁이 영사기로 투사한 듯 떠올랐다. 나는 아슴아슴 흐무러진 머릿속 이미지들을 붙들기 위해 서둘러 시나리오를 정리했다. 작업은 아침이 돼서야 끝났다.


‘미래 TV서비스는 트래디셔널 TV 사업자 주도하에 채널 서비스에 인터액티브 기능을 추가하는 형태로 진화할 것이고, 따라서 디맥스는 트래디셔널 TV 사업자들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되 인터액티브 기능에 대한 투자는 과감히 단행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인터액티브 TV 사업자와도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가 우리 결론이었다.



중간보고는 열띤 토론 속에 진행됐고 디맥스 임원들 모두 높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인터액티브 서비스 용 셋톱박스 사업을 검토하던 신사업팀에선 벌써부터 최종 결과물이 언제 나오냐며 기대감을 보였다. 인터액티브 서비스가 단기간 내 주류가 될 건 아니었지만 ‘하이브리드 TV’로의 진화를 위해선 신사업팀의 역할도 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임정혁 부장의 발표가 갈무리될 무렵 디맥스 셋톱박스 사업부장 권성일 대표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시장이 어떻게 진화하고 있다는 건 잘 이해했어요. 프로젝트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걸로 아는데 컨설턴트 분들이라서 그런지 정리를 빨리 하시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좀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도대체 ‘하이브리드 TV’라는 게 뭡니까?”


일순 정적이 내리깔렸다. 하이브리드 TV는 우리 결론이었는데 결론이 와닿지 않는다면 보고가 실패한 건가? 훅, 들어온 사업부장의 질문에 디맥스 임원들도 망연한 눈치였다. 발표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임정혁 부장은 연신 동공만 희번덕댔다. 무지근한 긴장감이 고조되는데 내 옆자리에서 낭창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하이브리드 TV’가 뭔지 궁금해지네요. 하지만 그건 여기 앉아있는 저희 성세윤 사원이 4주 후에 알려드릴 겁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센트 전략그룹 헤드파트너 이주완 대표였다. 작은 체구에 큰 머리와 뭉툭한 코 때문에 다소 촌스럽고 섬섬한 인상이었지만 외모와는 상반된 웅숭깊은 어세 때문인지 오히려 분위기를 압도하는 면이 있었다. 이주완 대표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생그레 미소 지으며 권성일 대표를 일견 했다. 이주완 대표와 눈을 마주친 권 대표는 호탕한 웃음으로 답했다.


“하하. 그렇군요. 제가 너무 몰입했나 봅니다. 최종 보고도 아닌데 말이죠. 벌써부터 4주 후가 기대되는군요.”


대기 가득 팽창하던 긴장감은 일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화기애애한 미소가 참석자들 안면 가득 퍼졌다. 이주완 대표는 ‘하이브리드 TV’에 대한 권 대표의 견해를 물으며 넌덕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권 대표는 잘 모른다 하면서도 미래 TV란 결국 방송과 인터넷 서비스 간 결합이라며 핵심은 파트너십을 통해 서비스 에코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을 거란 방향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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