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채널과 주문형 비디오의 하이브리드가 어떤 형태로 진화할지 생각해 봤다. 인터넷망을 통한 비디오 전송기술이 발전하는 건 불가피하기 때문에 화질은 궁극적으로 해결될 문제였다. 그렇다면 결국 차이는 전문가에 의해 큐레이션 된 콘텐츠를 보느냐 시청자가 스스로 선택한 콘텐츠를 보느냐였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구글의 맞춤형 광고와 서치엔진이었다. 인공지능에 기반해 콘텐츠를 추천해 주고 검색을 쉽게 해 준다면 채널 서비스와 주문형 비디오 서비스를 별도로 운영할 필요가 없었다. 시청패턴을 기반으로 전문가가 큐레이션 한 듯한 맞춤형 콘텐츠를 추천해 주고 필요할 땐 검색을 통해 원하는 콘텐츠뿐만 아니라 원했던 콘텐츠와 유사한 콘텐츠까지 찾을 수 있는 서비스야 말로 TV 서비스가 진화할 방향이었다.
그건 ‘트래디셔널 TV’나 ‘인터액티브 TV’는 아니었다. 그 둘을 복합한 ‘하이브리드 TV’도 아니었다. 그거야 말로 궁극적 형태의 ‘미래 TV’ 서비스였다. 나는 이 기능을 ‘인공지능 기반 콘텐츠 큐레이션’이라 정의했다.
만족스러웠다. 여기저기 산재했던 개념들이 디테일과 함께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임 부장이 언급했던 ‘핍진성’ 있는 모습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자신 있게 임정혁 부장 앞에 완성된 장표를 내밀었다.
임 부장은 길게 깎은 연필 한 자루를 들고 장표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머릿속으론 여기서 더 할 게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손에는 은근히 땀이 배었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는 사각사각 임 부장의 필기 소리만 들렸다.
“정리 잘하셨어요. 그래도 이 정도만 더 수정해 볼까요?”
임 부장은 긴 침묵을 깨고 연필로 수정한 장표를 건넸다. 임정혁 부장이 추가한 건 박스 하나와 화살표 3개가 전부였다.
진화! 스토리가 보였다. 현재와 미래가 연결됐고, 미래가 도래할 때 어떤 사업기회가 나올지 보였다. 뜬 구름 같던 미래의 모습은 실현 가능한 형태가 됐다. 현실에서 미래까지 어떻게 이어질지 디딤돌이 구체화 됐고 필요한 역량이 보였다.
임 부장의 옐로우펜슬이 디맥스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과 가져야 할 것의 경계를 명확히 해줌으로 정적이던 장표가 역동적으로 진화했다. 그 역동성이 핍진성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하면 디맥스도 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과 실행 로드맵이 바로 핍진성의 원동력이었다.
프로젝트를 돌이켜 보면 나는 두 가지 사고방식을 사용했다. 첫 번째 방법은 현재 알고 있는 사실을 상식과 로직에 기반해서 구조화하는 사고방식이었다. 두 번째는 디테일한 팩트를 조사하고 로직과 조합해 생각을 구체화하는 방식이었다.
사실 이 두 방법은 상호 보완적이었다. 구조에만 집중하면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되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어졌다. 반면 디테일에만 집중하면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핵심을 찾기 힘들어졌다. 임 부장이 얘기했던 상상하는 훈련이란 바로 이 두 사고방식의 조합이었다.
임 부장은 눈을 희번덕이며 연필로 덧그려진 장표를 보고 있는 나에게 말했다.
“컨설턴트에게 중요한 건 두 가지예요. 첫째는 가설에서 출발해 생각을 구조화하는 훈련이죠. 가설과 팩트가 상호 보완적이긴 하지만 출발은 가설에서 하는 것이 효과적이에요. 가설에서 출발하면 어떤 팩트를 찾아야 할지 집중할 수 있어 시간낭비를 막을 수 있고, 점점 가설의 정교함이 늘어 추가 지식 없이도 실제 답에 가까운 가설을 만들 수 있죠.
우리는 비즈니스 문제가 시험문제처럼 정해진 답이 있다 생각하고 그 답을 찾는데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문제가 주워지면 숨겨진 답을 찾기 위해 리서치를 하기 시작하죠. 쓸모없는 팩트와 지식은 갈수록 쌓여 가는데 답은 보이지 않고 스트레스만 쌓여가는 거예요.
하지만 답은 정해진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제시하는 거예요. 가설에 초점을 맞춰 시작하면 정보획득에 소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좀 더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답’을 구조화하고 만들어가는데 집중할 수 있죠.
두 번째 훈련은 사고의 유연성을 키우는 거예요. 영화를 보면 다양한 스토리텔링(storytelling) 기법이 있죠. 이야기 전개 만을 위한 무미건조한 장면도 있고, 섬세한 감정선을 드러내기 위해 표정연기에 초점을 맞춘 장면도 있어요.
비즈니스 스토리도 마찬가지랍니다. 때로는 논리적 구조를 통한 단순 명료한 메시지 전달도 필요하고 때로는 디테일한 묘사도 필요해요.
예를 들어 고객 서비스 수준 향상에 대한 필요성을 설파한다고 가정해 보죠. 설문 데이터가 있다면 결과를 구조화해서, “현재 고객 서비스 만족도는 70%에 불과하며 이는 마케팅과 영업 만족도 대비 10-20% 이상 낮은 수준이다”라는 식으로 얘기할 수 있어요.
이 방법은 객관적인 데이터에 기반하여 현재 서비스 수준을 수치적으로 알려주죠. 만약 마케팅, 영업, 서비스 등 다양한 관점에서 고객 만족도를 비교하려 했으면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일 거예요.
반면 고객을 인용하여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죠. “A고객은 서비스 신청을 했는데 스케줄 잡는 데 일주일이 넘게 걸렸고, 대기 시간도 3시간이 넘었습니다. 비용은 3만 원이나 냈고요. 나가면서 이 회사 제품을 다시 사면 성을 갈겠다고 하더군요.”
이러면 고객이 느꼈던 불만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며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였는지 알려줄 수 있죠. 특히 ‘다시 사면 성을 갈겠다’라는 표현은 현재 서비스 수준이 매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점을 시사해요. 낮은 고객 서비스로 인한 위기의식을 고취시려면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일 겁니다.
결국 중요한 건 적시 적소에 가용한 팩트와 논쟁의 목적에 맞춰 사고방식을 전환할 수 있는 유연성이에요. 다양한 비즈니스 문제를 접하며 유연한 사고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비즈니스 스토리텔링의 노하우가 생기며 역량도 늘고 재미도 저절로 붙게 될 거예요.”
임 부장은 말을 마치며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임 부장에게 또 한 수 배웠다. 비즈니스라면, 특히 경영 컨설턴트가 말하는 비즈니스라면 응당 팩트와 논리에 기반한 과학적이고 정교한 작업일 거라 생각했다. 한데 핵심은 ‘스토리’였다니!
팩트와 논리는 사실 가장 기본적인 조건일 뿐이었고 중요한 건 논리에 따라 구성된 팩트를 어떻게 조합해 임팩트 있는 스토리를 만드느냐였다. 비즈니스를 움직이는 건 사람이고, 사람을 설득하고 동기부여를 하는 게 바로 스토리였다.
상상력과 팩트가 조합되며 쪼뼛한 논리적 구조체가 직조되는 과정이 아롱아롱 머릿속에 떠올랐다. 구조체는 화살처럼 검세게 핵심을 파고들고는 격탕스레 휘돌며 번천헌지의 격변을 자아냈다.
비즈니스란 실로 해절 한 화법과 화술로 비전을 역설하고 거대 인파를 결집시켜 멋들어진 신세계를 축조하는 종합기술이자 예술이었다. 나는 관객처럼 현황을 조망하고 평론가처럼 분석할게 아니라 작가처럼 창작하고 감독처럼 연출해야 했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한편으론 얼마나 더 트레이닝을 받아야 하는 건지 숨이 턱 막혀 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종착역 뒤 새로운 길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과 의욕이 휘몰아치며 심곡에 훌렁 파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