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미래 TV서비스 전략 (4)

by 성세윤

중간보고가 끝나고 우린 쉴 겨를도 없이 바로 후속 작업에 착수했다. 임정혁 부장은 덜컥 내게 ‘하이브리드 TV’ 정의와 사업 추진방안 구체화 작업을 맡겼다. 최종보고의 핵심 모듈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주완 대표가 농으로 던졌던 말이 현실이 돼버리다니!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며 남은 4주가 기대됐다.


하이브리드 TV서비스 구체화를 위해 나는 일단 그 당시 출시됐던 서비스를 찾아봤다. 인터액티브 TV는 웹에서 TV로 플랫폼을 확장해 가고 있었다. BBC나 NBC 등의 콘텐츠 제작사는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콘텐츠를 제공했고, 이들 콘텐츠를 모아 제공해 주는 훌루(Hulu)와 같은 콘텐츠 수집(content aggregation) 서비스도 있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아마존의 경우 웹서비스에서 출발해 스마트 TV용 애플리케이션을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TV 플랫폼으로 확장했다.


반면 컴캐스트 같은 트래디셔널 TV 사업자 들은 팬캐스트(Fancast) 등 웹 기반 서비스를 내놓는 한편 주문형 비디오(VoD, Video-on-Demand) 중심의 인터액티브 콘텐츠를 케이블 TV에서 제공했다. 삼성, 애플과 같은 제조사도 TV를 통해 웹 기반의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스마트 TV나 셋톱박스 형 기기를 출시하며 시장에 진입했다.


TV와 웹을 사이로 경쟁이 확장되며 TV, PC, 스마트폰 사이에서 같은 콘텐츠를 공유하는 ‘쓰리 스크린’(three screen) 같은 서비스도 등장했다. 나는 우선 이런 동향을 기반으로 미래 TV의 모습을 그려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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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무언가 부족했다. 하이브리드 TV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밋밋하고 무엇보다 ‘미래’스런 모습이 전혀 안보였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블레이드러너>처럼 경탄성을 뿜을 만한 모습을 뇌리에 번뜩 각인시켜야 했다. 슬라이드를 넘겼을 때 전순간 이목을 집중시키며 ‘이게 하이브리드 TV의 모습입니다’라고 강단지게 단언할 수 있는 그림이 필요했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을 정리하면 하이브리드 TV의 특징이라 할 만한 몇 가지 요소는 판별할 수 있었다.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개방된 플랫폼이 필요했고, 이를 멀티 디바이스에서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기존 TV 시청자에 국한된 사용자를 뛰어넘는 수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일단 이런 특징들을 모아 정리해 보면 하이브리드 TV를 정의해 보기로 했다. 여기에 현재 채널 중심 서비스에서 어떤 인터액티브 서비스들이 더해질지 보여주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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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더 흥미로워지긴 했지만 이걸 하이브리드 TV의 정의라고 할 순 없었다.


“상상력이 부족해요!”


어깨너머로 내 장표를 할끔거리던 임 부장이 쏘아붙였다.


“상상력이요?”


“맞아요. 지금 세윤 씨 머릿속에는 분석과 논리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밋밋한 그림이 나오는 거죠.”


분석과 논리 밖에 없다니. 분석과 논리야 말로 컨설턴트의 근간 아니었던가? 뜬금없이 상상력을 거론하는 임 부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장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땐 분석과 논리가 중요했죠.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와 팩트가 많으니 그렇게 접근하는 게 당연해요. 최대한 팩트에 기반해서 현실을 그려야 하는 거죠.


하지만 미래를 그리는 작업은 달라요. 어느 정도는 상상력을 가미할 필요가 있답니다. 이번 작업은 특히나 더 그래요. 신사업팀 박 전무 요청이 있었거든요. 뭔가 기획팀과 제품팀에 영감을 줄 수 있을 만한 비전을 제시해 달라고 했어요.”


“그래도 현실성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SF소설 쓰듯 그냥 그릴 순 없습니다.”


“맞아요. 제가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한 건 팩트와 상식의 조합 차원에서 에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상상력만 동원해서 그림을 그릴 순 없죠. 소설가들이 말하는 ‘핍진성’이란 게 저희 작업에서도 필요하답니다.”


임 부장의 말은 날 더욱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상상력이 필요하면서도 핍진성 있는 미래의 모습이란 도대체 어떤 걸 까?


“지금 세윤 씨는 너무 컨설턴트처럼 문제에 접근하고 있어요. 지금은 오히려 현업 상품기획자처럼 접근을 해야 해요.


상품기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제품 콘셉트를 기획하는 일이죠. 콘셉트에 대한 아이디어는 자사 연구개발팀에서 나올 수도 있고 고객사나 경쟁사에서 나올 수도 있어요. 콘셉트 자체는 현실성이 있어야 해요. 개발 가능해야 하고 원하는 대로 작동해야 하죠. 이건 어디까지나 팩트에 기반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팩트보다 중요한 건 팩트를 조합해 비전과 제품 로드맵을 만드는 일이에요. 실리콘 밸리에서는 테크놀로지 스카우터(technology scouter)가 기술 동향을 조사해 자사 역량과 어떻게 조합될 수 있는지 검토하기도 합니다. 출시된 기술을 상상 속에서 조합해 보는 거죠. 그래서 조합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인수합병(merger & acquisition, M&A)을 하거나 관련 기술자를 채용하여 역량을 확보한답니다.


많은 사업자들이 서로의 혁신을 모방하고 또 그걸 자신만의 서비스로 소화하며 진화하죠. 그들 모두 서로의 상상력을 통해 성장하는 거예요. 이런 상상력이 결국 인력을 결집하는 비전이 되고 그들의 노력이 상상력을 현실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죠.


지금까지 세윤 씨가 한 작업은 팩트를 분석하고 수집하는 작업이었어요. 세윤 씨가 그린 그림도 그런 기능 단위의 특징들인 거죠. 이제부터 필요한 건 그런 기능들을 조합한 콘셉트이자 비전이에요. 세윤 씨가 해야 할 작업은 ‘하이브리드 TV’라는 새로운 개념의 정의지 하이브리드 TV 기능의 나열은 아닌 거죠.”


임 부장의 말을 모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작업 방향은 가늠할 수 있었다. 임 부장의 말대로 지금까지 분석하고 정리한 내용은 개별 기능에 불과했다. 필요한 건 기능을 조합해 이를 전체적으로 엮을 수 있는 하나의 비전이자 개념이었다. 그게 바로 ‘하이브리드 TV’의 정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우선 하이브리드 TV의 특성들 간 유사점을 찾아봤다. 고민 끝에 CPNT (Content, Platform, Network, Terminal)라는 프레임워크를 연결고리로 쓰기로 했다. CPNT는 콘텐츠를 서비스 플랫폼에서 네트워크를 통해 단말에 제공한다는 개념이었다. 통신 산업에선 오래전부터 쓰여 식상한 면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나풀대는 상상력에 핍진성을 더해줄 거라 믿었다. 미래 TV의 구성요소를 통신 서비스 프레임워크에 맞춰 분석한다는 점에선 신선한 면도 있었다. 모습도 비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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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구성만 바꿨을 뿐인데 이전 그림들과는 꽤 다른 모습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유기적으로 통합된 비전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내가 실제로 상품기획자라면 이 구성요소들을 어떻게 엮을 수 있을까?


난 임 부장이 말한 대로 상품기획자로 빙의해 문제를 풀어보기로 했다. 하이브리드 TV의 핵심 경쟁력은 서비스 다양성이었다. 기존 채널 서비스 외 다양한 인터액티브 서비스를 제공해야 트래디셔널 TV와 차별화하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자체 서비스 만으론 부족했다.


권성일 대표가 지적했듯 다양한 전문 서비스 업체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에코를 확장하는 게 중요했다. 따라서 채널이나 VoD 같은 핵심 영상 서비스는 자체적으로 제공하지만 나머지 서비스들은 자체 서비스 외 다양한 파트너사들과 협업이 필수였다. 바꿔 말하자면 하이브리드 TV의 최상단에 있는 서비스 레이어에는 디맥스의 서비스가 아니라 다른 잠재 파트너사의 서비스가 보여야 했다.


다음은 플랫폼의 모습이었다. 플랫폼은 서비스 사업자와 서비스 사용자 간 연결고리였다. 다양한 서비스와 서비스가 제공되는 다양한 네트워크 그리고 단말을 연결시켜야 했다. 위로는 서비스 사업자들이 손쉽게 서비스를 개발하고 제공할 수 있는 앱스토어 같은 환경을 만들어 줘야 했고, 아래로는 기존 TV 뿐만 아니라 웹과 모바일 환경까지 지원할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했다.


개방된 플랫폼을 구축하기 위해선 안드로이드 수준의 운영체계가 필요했다. 젠장. 고작해야 셋톱박스 펌웨어나 만들던 디맥스가 이런 운영체계를 어떻게 만들지? 개발인원이 100명도 채 안 되는 디맥스가 자체 운영체계를 만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플랫폼 개념을 다시 잡아야 하나 고민할 찰나 문득 생각이 들었다. 디맥스가 운영체계를 만들 수 없다면 만들어진 운영체계를 가져다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안드로이드를 만들 생각을 할 게 아니라 그냥 안드로이드를 가져다 쓰면 되는 일이었다.


안드로이드는 오픈 라이선스 기반이라 디맥스가 충분히 TV 용으로 커스터마이즈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간 구글 행보를 보면 그들이 안드로이드 기반으로 TV운영체계를 만들 거란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실제로 구글은 이 프로젝트가 끝나고 몇 년 뒤 안드로이드 TV OS를 출시했다.) 물론 그렇더라도 모바일 OS를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팀은 필요했지만 직접 OS를 개발하는 것보단 훨씬 효율적으로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었다.


추가로 디맥스 사업목적이 자체 서비스가 아닌 트래디셔널 TV 사업자들의 원활한 인터액티브 서비스 도입 지원이란 점을 상기하면 디맥스가 갖춰야 할 플랫폼 역량은 더욱 명확해졌다. 디맥스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채널 서비스와 인터액티브 서비스를 유기적으로 연동시키는 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기존 채널 서비스와 안드로이드 기반 앱 서비스 간 어떻게 빠르고 매끄럽게 전환할 수 있느냐, 통합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와 같은 영역이었다. 그러면서 사업자 별 커스텀 니즈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유연성이 필요했다.


플랫폼 개념이 명확해지니 네트워크와 단말은 비교적 쉽게 풀렸다. 네트워크는 서비스 자체가 인터넷 망을 통해 제공되는 IP기반 서비스다 보니 디맥스가 신경 쓸 부분은 없었다. 셋톱박스가 케이블망을 통해 인터넷과 방송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모바일 서비스는 안드로이드를 통해 연계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안드로이드를 통해 다양한 단말의 지원도 가능했다. 안드로이드 기반으로 개발되는 모든 단말에서는 서비스 호환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디맥스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스마트폰과 같은 소형 화면 용으로 개발된 콘텐츠를 TV화면에 최적화시킬 수 있는 쉽고 간편한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안드로이드에서 제공되는 OS 기본 기능을 보완하는 정도였다.


조금 더 구체화된 모습을 정리하니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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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TV의 특징은 서비스, 플랫폼, 네트워크, 디바이스 등 4개 영역에서 나타났다. 서비스는 다양성이 특징이었다. 기존 TV사업자들 뿐만 아니라 구글, 아마존 등 인터넷 서비스 업체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진입하며 인터넷상 모든 서비스가 TV를 통해서도 구현됐다.


서비스 플랫폼은 개방성이 특징이었다. 안드로이드 OS 기반으로 개발자와 다양한 사업자가 생태계를 이루며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었다. 여기에 디맥스 자체 기능들을 추가해 개발자들이 모바일과 TV간 매끄럽게 연동되는 앱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네트워크는 IP기반으로 유무선 네트워크를 자유로이 오가며 서비스될 수 있도록 했고 디바이스는 확산성이 특징이었다. 많은 서비스들이 스마트 TV와 미디어 플레이어, 셋톱박스 등 각종 영상가전 디바이스를 통해 접속 가능했다. 또한 미디어 플레이어나 스마트폰처럼 휴대용 디바이스에서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하이브리드 TV가 ‘스마트홈’(smart home)을 구현하는 중추적 역할을 할 것으로 봤다. PC와 스마트폰이 개인 서비스의 창구 역할을 한다면 TV는 가정 단위 서비스의 창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홈시어터, 난방기, 방범 카메라 등 스마트 홈을 위한 각종 가전의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헬스케어, 커뮤니케이션 등 새로운 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TV를 시청하다 하교하는 자녀의 위치가 궁금하면 TV에 창을 띄워 위치를 확인하거나 TV를 통해 영상통화를 하는 모습도 상상할 수 있었다. TV를 통해 영화, 드라마 등의 영상 콘텐츠뿐만 아니라 웹기반 애플리케이션 등 다양한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었다.


또한 스마트폰, PC 등 다른 기기와의 호환성을 강화하여 점점 사용자 친화적으로 스마트하게 진화하는 것이 내가 예상한 하이브리드 TV의 모습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전개한 후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누가 뭐라 해도 TV서비스의 핵심은 영상 서비스였다. ‘쓰리 스크린’이나 ‘스마트홈’ 같은 서비스가 흥미로운 아이디어이긴 했지만 좀 더 설득력이 있으려면 영상 서비스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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