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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Oct 23. 2024

21. 귀국

4부 낙원을 향해


그 후로 5일간 남은 여정이 이어졌다. 우린 분주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과 헤이트 애쉬베리 거리를 거닐었고, 하프 문 베이에서 황홀하기만 한 낙조에 넋을 잃기도 했다. 고즈넉한 소살리토 다운타운에선 여유롭게 아이스크림과 쿠키를 즐겼고 나파밸리 욘트빌에 있는 부숑 베이커리에서 아몬드 크루아상을 맛봤다. 마지막 날이 되자 연서는 예상대로 가기 싫다며 떼를 썼고 아내와 나는 샌프란시스코 노숙자들과 살 거면 남으라고 응수했다. 그렇게 웃고 즐기는 사이 샌프란시스코 가족여행은 끝났다.


아내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약간 긴장한 듯 표정이 굳어졌지만 다행히 공황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내를 억지로 복도 자리에 앉히고 내가 중간에 앉아 연서 잡담을 다 받아 주니 한결 마음이 편했던 모양이다. 출입국 심사를 마치고 주차장에 가려는데 연서가 캐리어를 타고 앞으로 치고 나갔다. 아내는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에 주머니를 뒤적이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결국 카트에 짐보따리까지 한가득 안고 있던 내가 연서를 잡아야 했다. 연서는 보란 듯 날쌔게 방향을 바꿔가며 사람들 사이를 전진했다. 


“연서야! 위험해, 천천히 가.”


난 연서를 향해 외쳤다. 순간 연서는 드래프팅을 하듯 180도를 틀어 나를 향해 돌아섰고 나는 깜짝 놀라 멈추려다 스텝이 꼬이며 미끄러졌다. 하필 카트 브레이크도 고장 났는지 손잡이를 잡아 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슬라이딩하듯 카트에 끌려 발만 바둥거리게 됐다. 좌우로 방향을 틀고 몇 번이나 엎어지려다 겨우 멈춰 섰다. 고개를 드는데 안륜근이 잔뜩 수축되어 몇 겹으로 눈꺼풀이 접힌 커다란 두 눈동자가 보였다. 연서였다. 손으로 틀어막은 입에선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도 피식하고 웃음이 새 나왔다. 연서는 손을 내리고는 활짝 입을 벌리고 깔깔거리며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나도 연서를 따라 웃었다. 한번 터진 웃음은 멈춰지질 않았다.


아! 웃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였구나!


신기하게도 눈가에 눈물이 고일 만큼 웃었는데 숨은 막히지 않았다. 다른 특이 증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서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신나게 웃음을 토해 냈다.


웃는 와중에 강인찬 박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심각한 표정으로 희귀 불치병을 언급하며 날 진단하던 사기꾼 같은 모습이 말이다. 이리 실컷 웃어도 아무렇지 않은데 무슨 희귀 신경질환이란 말인가! 생각해 보면 이번 여행 내내 웃음을 터트렸던 때도 종종 있었다. 물론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꼭 강인찬 박사의 말이 사기라고 단정할 순 없었다. 난 실제로 희귀 불치병에 걸렸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가짜 웃음을 배웠고, 그래서 지금도 가면을 쓰고 가짜 웃음을 짓고 있기 때문에 증상이 발현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여행 내내 나 자신과 ‘플라토닉 이별’을 하겠다며 소동을 벌였으니 무의식중에 가면을 만들고 쓰는 데 익숙해졌을 수도 있지 않은가!


문득 두 개의 세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나는 희귀 불치병 때문에 진심으로 웃지도 못하고 꼭두각시처럼 껍데기 인생을 살아가는 40대 가장의 음울한 세계였고, 다른 하나는 사기꾼 의사 말에 속아 몸과 정신을 분리해 사는 게 가능하다고 믿게 된 과대망상증 환자의 농담 같은 세계였다. 두 세계 중 어느 것이 진실이고 실제 현실인지 논리적으로는 판단 불가했다. 어쩌면 두 세계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중첩된 상태로 공존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긴, 어느 게 진실인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결국 ‘진실’이란 것도 내가 ‘세계’라고 정의한 어떤 임의의 시공간에 붙인 임의의 라벨 내지는 태그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명명한 모든 사물과 말로 서술하는 모든 활동이나 경험이란 ‘언어’라는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무의미한 난센스가 되는 걸까? 그래서 결국 말로 소통되는 모든 건 상대적이고 허무하다는 불가피한 결론에 도달해 침묵을 지켜야만 하는 걸까?


결론적으론 아니었다. 말이란 진정 공허한 울림일 뿐이지만 말을 통해 의미가 현현하고 실재가 축조됐다. 상대적이고 허무하게 되는 건 오히려 소통의 한계를 운운하며 침묵할 때였다. 앨커트래즈섬에서 찍었던 스냅숏은 ‘파란 하늘’, ‘시원한 바닷바람’, ‘날개를 나풀대는 나비’, ‘아내의 미소’ 그리고 ‘연서의 카트휠’ 따위의 말로 내 심상에 저장되어 있다. 언젠가 내가 그런 말을 꺼냈을 때 그 말의 의미와 그 말로 연상되는 풍광이 아내나 연서의 사적 체험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통해 무언가 ‘현실’이나 ‘경계’를 초월한 공감대가 형성될 거라 확신할 수 있다. 그 경이로운 경험의 근간이 결국은 말과 소통인 것이다. 


‘나’라고 정의된 임의의 존재가 우연히 ‘너’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 결실로 연서라는 놀라운 생명이 태어났다. 우리 셋의 삶이란 우연의 연속이었고 우린 임의의 선택을 통해 하나의 여정을 만들어 갔다. 그 여정은 대체로 행복했지만 때론 돌이킬 수 없는 상처에 아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행복도 아픔도 서술되지 않은 여정은 여정으로 남지 않았다. 말하고 소통한 여정만이 하나의 서사로 탄생할 수 있다. 그래서 난 이렇게 ‘샌프란시스코 가족 여행기’를 쓰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무작위로 선택한 단어들의 불특정한 나열에 불과할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불치병을 앓는 듯한 모순된 현실을 일시적으로나마 초월한 치유의 여정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난 스냅숏처럼 기억에 남은 앨커트래즈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 풍경을 여기 적힌 이 언어와 문자를 통해 연서의 딸과 딸의 딸 또한 떠올릴 수 있을 거란 몽상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때 앞서가던 아내가 발걸음을 멈춰 서며 전화를 받던 손을 툭 떨어뜨렸다.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아내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카트를 밀려는데 아내가 스르르 뒤를 돌아봤다. 끓어오르는 두 눈동자가 성난 아귀처럼 날 쏘아봤다.


“여보! 어머니 감기 걸리셨다고 왜 말 안 했어? 출발할 때 통화했다며!”


젠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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