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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Oct 18. 2024

18. 너의 이야기

3부 상실된 언어를 찾아


난, 내 아이를 죽였어. 살아 있는 아이를 산 채로 갈가리 찢어 거열형에 처했어. 은유 같은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야. 지금 난 구곡간장이 미어지는 마음으로 내 죄악을 고해하는 거야.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이니?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식을 그렇게 죽일 수 있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현실인지 하루에도 수십 번 물어봐. 그리고 나 스스로를 설득하지. 난 지금 악몽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뿐이라고, 내가 누굴 죽이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야. 언젠가 이 꿈에서 깰 거라 당당히 말하지. 하지만 매일 눈을 감으며 기도해도 눈을 떠 보면 세상은 언제나 똑같아. 그냥 이 세상 자체가 악몽이고 지옥인 거야. 


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지옥인지 알고는 있니? 아무런 예고 없이 불현듯 그 아이 얼굴이 떠올라. 어두운 뒷골목에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몸을 흔들거리며 날 주시하고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속에서 볼록렌즈처럼 불거진 눈동자에 핏기를 바짝 세워 날 보고 있어. 석션기 바늘에 찔려 부서지고 일그러진 그 얼굴이 떠오르면서 숨이 꽉 막혀 와. 저 죄악을 저지른 게 다름 아닌 나라는 생각에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 내 자궁 어딘가에 그 애 살덩이 한 점이 남아 원혼을 계속 불러내는 것 같아. 난 지금 죗값을 받고 있는 거겠지? 하긴 난 그렇게 당해도 싼 년이니까 할 말은 없어.


근데 정말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일요일에 아줌마 퇴근하고 연서와 단둘이 있을 때야. 주중엔 강의하고 아빠 병원에 가고 해서 정신이 없어. 그런데 주말엔 달라. 가만히 있어도 그 아이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데 연서마저 울기 시작하면 정말 미칠 것 같아. 내 몸뚱어리를 꽁꽁 결박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갑자기 정신이 훅 나가 연서에게 무슨 짓을 할까 봐 말이야. 연서 울음소리가 들리면 생각해. ‘내가 살기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마들렌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말이야. 네가 생각해도 내가 미친년이지? 자식을 잡아먹은 쳐 죽여야 할 못된 년인 거야, 나는.




며칠전엔 네가 전화를 했어. 맡았던 계약이 잘돼서 보너스를 받게 됐다고 하더라. 나도 축하해 주고 싶었어. 정말 하고 싶었던 계약이잖아. 그런데 그 말과 함께 네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오한이 서렸어. 네가 너무나 혐오스럽고 끔찍하게만 느껴졌어. 난 온갖 트집을 잡으며 너에게 욕설을 퍼부었지.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안 나. 네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다른 걸까? 넌 도대체 어떤 세상에 살길래 그 아이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웃을 수 있는 거지? 넌 나도 연서도 없는 그곳에서 그렇게도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거니? 난 여기서 이렇게 썩어 가고 있는데 말이야.


넌 항상 그런 식이었어. 미국에 있을 때도 그랬지. 전기 나갔다고 말했던 날 기억나니? 난 전기가 나가면 난방도 꺼진다는 걸 그때 알았어. 관리실에 전화해 보니 점검한다고 한 시간만 기다려 보라고 하더라. 그런데 온 집안에 냉기가 돌고 연서 입술이 파랗게 변할 때까지 점검이 끝나지 않는 거야. 아는 사람도 없고, 차도 없고, 덜컥 겁이 났어. 철저히 무기력한 나 자신에 화가 났지. 말 못 하는 연서가 추위에 떨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고 춥다 해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거야. 그날 넌 야근한다며 저녁 8시가 넘어서 들어왔지. 나와 연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넌 되레 야근까지 했다며 나한테 짜증을 냈지.


이번에도 짜증을 낸 건 너였어. 넌 아직도 마들렌 기억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이러면 어떻게 하냐고 날 채근했지. 그래, 한편으론 이해가 돼. 나도 표독스러운 나 자신이 짜증 나는데 넌 오죽하겠어? 하지만 그렇게 화가 치밀어 오르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돼. 나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누군가가 되어 버린다고. 너도 머리라는 게 있으면 생각해 봐. 자식년을 죽여놓고 맨정신으로 살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 낭떠러지가 있으면 뛰어내리고 싶고 수면제가 있으면 한 주먹 가득 쥐어 통째로 입에 털어 넣고 싶어. 나라고 이런 내가 좋겠니? 하지만 공황증세가 시작되면 나도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어. 난 전화를 받다 말고 그 자리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열분을 토하며 눈물을 쏟아 냈지. 멈출 수가 없었어. 넌 수화기 너머로 울음소리를 듣고 무슨 말을 할지 어쩔 줄 몰라 하더라.


아마 그때 그런 내 모습을 처음 봤을 거야. 근데, 그거 아니? 네가 미국에서 힘들다고 징징대며 매일 잘 거 다 자고, 먹을 거 다 먹으며 지내는 동안 난 연서와 씨름하고, 강의 나가고, 아버지 돌보면서 그렇게 지옥을 살아. 도저히 못 견딜 때면 집을 뛰쳐나와 미친년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거리를 걸어. 한번은 숨이 꽉 막히고 다리에 힘이 빠져 미꾸라지처럼 흐느적거리다 털썩 주저앉아 버렸지. 통곡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가슴을 쳐 대도 속이 풀리질 않았어. 무언가 묵직한 쇳덩이가 가슴 한가득 차올라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고.


그런데 뭐? 넌 고작 내가 목소리 좀 높였다고 화를 낸 거니? 난 칼날 같은 울분과 통곡을 온 몸 가득 채우고 매 순간을 극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어. 미쳐 죽을 것 같은데 막상 죽을 정도로 미치진 않아서 더 괴로워. 차라리 미친년이 됐다면 뇌신경이 갈가리 끊겨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럼 네가 지금 내 심경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까? 미쳐 버린 날 보며 죄책감을 느끼긴 할까?


나쁜 놈! 너도 죄책감을 느껴야 해. 따지고 보면 이건 다 네 책임이야. 네가 ‘마들렌’이란 이름만 붙이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 그 아인 그냥 내 안에 있었을 뿐이야. 그냥 나였다고. 내 몸은 내 거 아니니? 내 안에 있으면 그것 또한 나인 거야. 내 심장이 나인 것처럼 말이야. 그래, 이해는 해. 넌 태명으로 생명과 활기를 부여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 아이는 칠흑 같은 어둠의 바다로 돌아가는 파도처럼 무의 상태로 있었어야 했어. 그럼 내 고통도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부서지는 파도처럼 사라졌을 거야. 그런데 넌 그 고통에 형상을 부여했고 고통으로부터 망각의 권리를 앗아갔어. 난 내 고통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 끔찍한 결과가 생긴 거란 말이야. 모든 게 그 멍청한 마들렌이란 이름 하나 때문이었다고.


넌 항상 네 마음대로 모든 걸 정했지. 마들렌이 생겼던 그날도 마찬가지야. 그날 난 정말 힘들었고 그냥 쉬고만 싶었어. 그런데 넌 굳이 그 짓을 하겠다며 날 덮쳤지. 상대방 의사에 거스른 성관계를 뭐라고 하는 줄 아니? 강간이야. 그래! 그날 네가 한 행동은 강간이었어. 저항할 힘조차 남지 않았고, 너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으니까 난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어. 좋아, 부정하진 않을게. 처음엔 널 거부했지만 내 몸이 멋대로 반응하긴 하더라. 난 그 반응에 설득되어 나도 널 갈구하고 있었다고 착각하면서 너에게 몸을 맡겼지. 피임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 깊숙이 처박아 버린 것도 나였어. 그러니까 난 너에게 강간당하고 나 자신에게조차 강간당한 거야. 너와 내가 동시에 날 강간한 거라고!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고? 난 지금 너에게 내가 왜 그렇게 끔찍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얘기하고 있는 거야. 한국에 온 후로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이었어. 난 여전히 연서라는 불안한 생명을 지켜 내고 아빠의 안타까운 죽음을 지켜보며 매일매일 숨이 막히도록 압박당하며 살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너 때문에 어느 순간 마들렌이란 이물감까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버렸어. 뾰족한 송곳에 찔린 듯한 격통이 되어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지. 내 안에 날 괴롭히는 그런 이질적 존재가 있다는 걸 참을 수 없었어. 혼자 있을 때면 마들렌이 배 속에 누워 쪽쪽거리며 손가락 빠는 소리가 이명처럼 울렸고 배에 손을 올리면 마들렌의 맥박 소리에 속이 울렁였어. 그러다 문밖에서 연서 울음소리가 들리면 덜컥 내려앉는 심장을 움켜쥐고 괴로워했고 이따금 떠오르는 아빠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단 말이야. 수십 번 절규하고 또 외쳤어. 죽고 싶다고 외쳤지만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이었지. 고통은 끊임없이 날 겁박했고, 더 이상 싸울 수 없었어. 그리고 어느 날 새벽. 텅 빈 방에서 혈루를 쏟아 내며 이런 지옥에선 도저히 살 수 없겠다고 체념하니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르더라. 


첫 번째는 이 괴로움의 여정이 결국 하나의 결말로 귀결될 거라는 확신이었어. 언제고 난 손목을 칼로 긋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려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하게 될 거야. 그렇게 내 생명을 끊는 동시에 마들렌의 생명도 끝나게 되겠지. 마들렌에겐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내가 어떤 권리로 마들렌이란 생명을 태어나게 하겠어? 이런 세상에 태어나 나 같은 년 밑에서 커야 한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 마들렌을 위해서라면 그냥 이대로 있기만 하면 되겠지. 난 이미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으니까. 이대로 괴로워하기만 하면 나도 모르는 새 죽음에 이르게 될 거야.


하지만 연서와 아빠는? 내가 없으면 그 두 사람은 어떻게 하지? 연서와 아빠를 생각하면 난 어떻게든 살아야 했어. 그 두 사람은 이미 지옥 같은 현실에 놓여 있잖아. 나라도 지옥에 남아 이들을 돌봐야지. 그때 깨달았어. 모두를 위한 결론이란 하나밖에 없는 거란 사실을 말이야. 마들렌을 위하고 연서와 아빠를 위하는 방법이란 하나밖에 없었지. 내가 죄악의 업보를 짊어지더라도 마들렌의 생명을 끊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어. 


그래야만 했냐고? 그래야만 했어!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어. 


하지만, 어쩌면 이 모든 생각들은 내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의지의 표명에 불과한 건지도 몰라. 내가 살고 싶어서 이 모든 변명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걸 수도 있지. 그냥 내가 살기 위해 이런 선택을 한 거라면 난 평생 그 선택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야. 내가 살고 싶다는 게 왜 잘못이야? 나도 생명이야. 살고 싶어. 내가 살려고 선택했다면 그건 정당방위 아닌가? 제발 맞는다고 해 줘. 내 결정이 옳았다고, 그 누구도 내 상황이라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고 말이야.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뭐든 해 보란 말이야, 이 병신아!




미안해. 나도 알아. 네 탓이라고 하긴 했지만 아니란 거.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어. 마들렌은 그냥 이름뿐이고, 네가 이름을 붙이기 전까진 존재조차 인식되지 않던 아이였다고 말이야. 그래야 시간이 지났을 때 쉽게 잊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아이니까, 아직 생명이 되지도 못한 내 일부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지. 내가 바보였던 거야. 하물며 피부에 난 상처도 흉터가 남기 마련인데 영혼을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고 아무렇지도 않겠니? 처음엔 그게 끝일 거라고 생각했어. 너무 힘들었지만 결정한 이상 그냥 결정한 대로 하면 된다고, 나머진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지.


그런데 자꾸 떠올라. 아마도 쉬지 않고 뛰던 심장 때문인 것 같아. 그토록 생각하기 싫고 인정하기도 싫었던 아이인데 어느 날 그 아이 심장과 내 심장이 동시에 리듬을 맞추며 뛰고 있는 게 느껴졌거든. 그래서 심장 소리만 들리는 적막이 찾아오면 불현듯 그 아이가 떠오르나 봐. 왜 지금 또 그 생각이 나는 걸까?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싶었는데 뺨이 축축이 젖어 가고 있어. 나와 함께 심장박동을 맞추고 싶어 하던 그 아이를 내가 죽인 거야. 난 언제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기를 쓰고 버티다 보면 기억도 무뎌질까? 아니면 죽음을 맞이해야만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을까?


너무 고통스러운데 나도 내 고통을 이해할 수 없어. 생각해 봐. 마들렌은 이제 존재하지 않잖아. 그런데 어떻게 내 머릿속엔 이리도 생생히 존재하는 걸까? 마들렌은 이제 사라져 버렸는데 어쩜 이리도 강렬한 실체가 되어 나를 괴롭히는 걸까? 마들렌 생각만 하면 이렇게 고통스럽고 내 고통이 실재한다는 걸 온몸으로 이리도 생생히 느끼고 있는데, 그런데도 마들렌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 마들렌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내 고통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이 강렬한 존재성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어. 내 의식을 구속하며 이렇게 압박하는 데 이게 어떻게 허상일 수 있겠어.


나도 내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뭐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어. 몸은 순식간에 녹초가 돼 버려. 몸은 서 있지만 정신은 두려움에 떨면서 전력 질주를 하고 있거든. 무서우니까 어디로든 달아나려는 거야. 가만히 서성이고 있는데도 식은땀이 나고 숨이 막혀와. 그럼 난 도대체 내 몸이 왜 이러나 하면서 덜컥 겁이 나고 숨이 막힐 때까지 뜀박질할 수밖에 없어. 도대체 날 뛰게 하는 건 뭐지? 심장을 이렇게 겁박하는 건 뭐지? 무언가가 갈비뼈를 짓눌러 폐를 압박하니까 나는 숨을 최대한 크게 들이마시면서 흉곽을 부풀려. 그렇게 부풀리고 또 부풀리다 보면 가슴이 뻐근하고 오금이 저려 와. 그런데도 숨은 쉬어지질 않아.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기만 해.




내가 고통스러워할수록 너도 힘든 거 알아. 나도 모르게 너에게 짜증 내고 화를 내게 되니까. 하지만 난들 그러고 싶어 그러겠니? 나도 이 고통의 원인을 찾아보려 노력했어. 이 고통 때문에 가장 괴로워하는 게 나인데 왜 안 해 봤겠니? 명상도 하고 요가도 하면서 천천히 생각해 봤어. 내게 고통을 주는 걸 하나씩 되새기면서 의식에서 지워 봤지. 내게 고통을 주는 모든 것을 하나씩 지워 나가다 보면 고통이 내 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야.


그런데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게 있더라. 내가 정말 지우고 싶은 단 하나의 존재, 잔혹하게 마들렌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던, 자기밖에 모르는 그 추잡한 '나'라는 존재는 지워지지 않았거든. 나라는 존재가 내 심연의 밑바닥에 괴물처럼 들어앉아 꼼짝을 않는 거야. 그제야 알 것 같았어. 내 고통의 근인이란 다름 아닌 나였던 거야. 아, 머리가 아프기 시작해. 다시 또 발작이 시작되나 봐. 괴물이 보여. 내 심연 깊숙이 잠자고 있는 저 괴물 말이야. 아니, 내가 아는 나는 결코 그런 짓을 할 수 없어. 나는 내가 아니야. 이게 나일 순 없어. 핏덩이 같은 자식을 그렇게 무참히 살해한 악마가 나일 순 없어. 그래, 저 괴물은 내가 아니야. 저건 그냥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괴물일 뿐이야. 그럼 도대체 나는 어디 있는 걸까? 


모든 걸 잊고 싶어. 이 지옥 같은 울화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 순간 불가피하게 누군가가 되어 버려. 어떻게 하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질 수 있을까? 모르겠어. 난 누구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럼 내가 되는 것도 내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것 아닐까?


더는 견딜 수 없어서 프로작 20mg짜리 알약 네 알을 집어 들었어. 내 힘으로 나와 이별할 수 없다면 이것도 방법일 거야. 약을 집어삼키면 미친 듯 날뛰던 심장박동이 늦춰져. 마치 시간지연이 발생한 듯 시공간에 이질감이 생기지. 난 도대체 어디 있고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굴까? 어쩌면 이게 답인지도 모르겠어. 말할 수 없는 누군가가 되는 것 말이야. 그럼 아무도 아닌 게 되는 거겠지? 말할 수 없는 누군가라면 아무도 부르지 못할 테고, 나만 조용히 있으면 나는 그냥 가뭇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꼭두각시 인형이 돼서 날 조정하는 실오라기 장단에 맞춰 웃어야 할 것 같을 때 웃고, 울어야 할 것 같을 때 울며 살아가면 되겠지. 그게 나쁠 거 뭐 있겠어? 지금처럼 프로작과 자낙스로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고 빈 껍데기로 살아가면 최소한 이 울화는 없앨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제발 부탁이야! 날 이대로 잠들게 내버려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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