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숙소는 6인실 다인실이었다. 가능하면 1인실로 묵고 싶었지만, 가격 차이가 너무 컸다. 1인실은 12만 원, 다인실은 5만 원. 여행 중 하루 숙박비로 12만 원이 특별히 비싼 건 아니었지만, 다인실과의 차이를 생각하니 망설여졌다. 어차피 목적은 잠뿐이었다. 공용 샤워실이든 주방이든 상관없었다. 물론 1인실이 편하긴 하겠지만, 그날의 피로도라면 클럽 한가운데서도 곯아떨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치열한 논쟁이 시작됐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잠만 잘 건데 다인실이면 어때.”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다인실이야? 궁상맞게.”
“7만 원이면 밥 한 끼는 제대로 먹을 돈이야.”
“7만 원은 네 월급의 1%도 안 돼.”
수백만 원짜리 명품은 망설임 없이 사면서, 이런 선택 앞에선 항상 망설여진다. 정오가 다 되어서야 결국 다인실을 선택했다. 스스로를 설득하듯 ‘청춘 여행지에서 청춘 감성도 느껴보자’는 말로 결정을 마무리했다. 이런 사소한 고민도 여행의 일부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첫날 밤을 새고, 당일 숙소를 정하다니. 괜히 피식 웃음이 났다.
다행히 불편함은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식당과 휴게실에서 보냈고, 방은 정말 잠만 자러 들어오는 곳이었다. 짐도 거의 차에 두고,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만 챙겼다.
정비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바다와 벌판, 설산과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이 도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운전대를 꺾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같은 듯 다른 풍경이 시선을 붙잡았다. 세찬 바람에 요동치는 바다가 있는가 하면 미동 없는 푸른 호수도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벌판은 태양빛에 황금빛으로 반짝였고, 하늘은 그 모든 것을 투명하게 감싸 안았다.
반도의 끝자락, 스나이펠스요쿨 국립공원의 해안 절벽을 따라 천천히 달렸다. 중간중간 차를 멈추고 가볍게 하이킹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로라를 본 밤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자연의 얼굴들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이 정도면 오늘은 멋진 일몰도 볼 수 있겠지. 쾌청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대가 부풀었다.
일몰은 삭스홀 분화구에서 보기로 했다. 해발 100미터 남짓한 언덕 같은 분화구로, 정상까지 철제 계단이 잘 놓여 있어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정상에 오르면 대서양까지 시야가 트이는 구조여서, 일몰을 보기엔 제격이었다.
가볍게 숨이 찰 정도로 계단을 오르자 깊게 패인 분화구가 나타났다. 분화구 끝에 다다르자, 괴수의 아가리처럼 벌어진 풍경이 시야에 가득 찼다. 검붉은 용암석은 마치 거대한 폭발에 휘말린 듯 거칠게 찢겨 있었고, 그 갈라진 틈마다 이끼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이끼는 질기고 오래된 숨결 같았다. 용암석에 들러붙어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수천 년 전, 땅이 숨을 멈춘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천천히 바위를 파고들며 이 땅의 일부가 되었다. 아마 수천 년 뒤에도 이끼는 이곳에 남아 자신들의 터전을 지킬 것이다. 바위를 비집고, 또 파고들며, 세상과 묵묵히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이끼를 바라보다 문득 나 자신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무심한 눈에는 나도 분화구에 붙어 사는 이끼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눈부시지도, 싱그럽지도 않은. 다만 존재하려 애쓰는, 그런 생명. 하지만 생명이란 꼭 빛나야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조용히 바위를 비집고 파고드는 것만으로도, 존재는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일몰은 기대와 달리 화려하지 않았다. 한낮의 푸른 하늘은 어느새 구름에 가려졌고, 잠시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태양은 곧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빛은 사라졌고, 풍경은 조용히 식어갔다. 그림자가 드리운 듯, 소리 없이 하루가 저물었다.
나는 분화구 정상에서 드넓은 용암대지가 붉게 물드는 모습을 그려봤다. 그 장면은 현실이 아닌 상상 속에서 완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쉽지만은 않았다.
가장 기다리던 순간이 허무하게 지나가는 경우는 자주 있다. 하지만 그 허무함과 공백 사이엔 언제나 작고도 진실한 무언가가 숨어 있다.
세상은 언제나 극적으로 빛나지는 않는다. 때로는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저무는 것조차 충분히 의미 있다. 나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살아냈다는 사실에 조용히 감사했다.
이동경로
Rif 마을: W59H+G2G, 360 Rif, Iceland
Skardsvik 해안가: Skarðsvík Beach
삭스홀: Saxhóll Crater
Rif 마을 뷰포인트
반도 끝을 향해 가다보면 Rif라는 마을이 나온다. 양쪽으로 호수가 있는데 호수에 비치는 설산과 마을 반영이 멋있다. 마을에 들어갈 필요는 없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볼 수 있다.
Skardsvik 해변 뷰포인트
574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비포장 도로인 579번 도로로 들어가야 한다. 비포장 도로라도 길이 험하진 않다. Skardsvik 해변까지 가다보면 멋진 해변절벽과 세찬 파도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대서양 감상할 수 있다. 도로 곳곳에 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보면 된다.
Saxholl 뷰포인트
주차장에서 철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쉽게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분화구를 따라 걷다보면 빙하 방향과 대서양 방향으로 조망이 가능하다. 사방이 트여있고 이끼로 가득한 용암대지가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