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으며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스나이펠스네스 반도의 서남쪽 끝, 말라리프 등대와 론드란가드를 시작으로 아르나르스타피까지 훑어볼 계획이었다.
말라리프 등대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4시. 예상대로 주차장엔 아무도 없었다. 헤드램프를 켜고 몇 걸음 걸으니 어둠 속에서 등대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내가 그리던 장면은 하얀 등대를 감싸 안은 푸른 오로라였다. 그러나 현실은 구름 가득한 하늘.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장노출로 몇 컷 찍어봤지만, 그저 밋밋한 기록에 지나지 않았다.
론드란가드 뷰포인트로 자리를 옮겼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새벽 촬영은 포기했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해안선을 따라 어두운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잔잔한 파도 소리만이 공간을 암시할 뿐, 세상은 암흑이었다. 새벽 바람이 간간이 해안에서 불어왔지만 북극 바로 아래라는 걸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춥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한 걸음 속에서 체온은 포근히 유지됐다. 공해도, 광해도, 소음도 없었다. 그저 어둠과 나뿐. 마치 세상이 나를 위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
주변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하자 아르나르스타피로 이동했다. 스나이펠스네스 반도 남쪽 중앙에 위치한 작은 마을. 내륙 쪽으로는 삼각형 모양의 스타파펠 산이 바다 쪽으론 가파른 주상절리 절벽이 이어져 있었다. 그 절벽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가 오늘의 길이었다.
바람은 거칠었고, 바다는 쉼 없이 검푸른 파도를 토해냈다. 빛은 아직 오지 않았고, 세상은 푸른 기운에 얇게 덮여 있었다. 절벽 끝을 따라 이어진 길엔 나와 바람밖에 없었다. 길 끝에 다다르자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다리가 나타났다—스톤브릿지였다.
바위는 바다를 가로지르며 다리를 만들고 있었고, 파도는 그 아치 아래를 통과하며 깊은 호흡을 반복했다. 날숨을 따라가면 끝없이 펼쳐진 대서양이 있었고, 들숨을 따라가면 스타파펠 산과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가 있었다. 세상이 숨 쉬는 모습이었다.
조금 더 걸으니 바다 위로 커다란 아치 하나가 솟아 있었다. 가트클레튀르였다.
거대한 해식 아치는 바다가 하늘에 손을 뻗다 영원히 굳어버린 모습 같았다. 매끄러운 곡선은 마치 고대 문명의 잔해처럼 느껴졌고, 거센 파도는 아치 밑을 넘나들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수천 년 동안 파도가 바위를 두드려 깎아낸 작품. 그 생각을 하자 마음속 어디에선가 묶여 있던 족쇄 하나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껏 쥐고 버티고 참아낸 수많은 것들은 과연 저 파도처럼 수천 년의 세월을 두드릴 수 있을까? 아니면 저 바위처럼 수천 년의 세월을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늘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있었고, 아침 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했다. 내가, 조금은 더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로를 한 바퀴 더 걸었다. 그렇게 ‘아이슬란드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스나이펠스네스반도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변덕스러운 날씨 따라 흥분과 아쉬움이 교차했지만, 그 감정들조차 다음 여정에 대한 기대감을 더할 뿐이었다.
남은 7일, 아이슬랜드는 내게 또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이동경로
말라리프 등대: Visitor Center at Malarrif
론드란가드 뷰포인트: Lóndrangar Parking-arctic fox
아르나르스타피: Playground 혹은 Bárður Snæfellsás Statue
아르나르스타피 뷰포인트
주차장에 도착하면 바로 트레킹 길을 찾을 수 있다. 길을 따라 해안가를 걸으면 가트클레튀르와 스톤브릿지까지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