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서클, 아쉬움이 머문 길

by 성세윤

본격적으로 링로드 남부 투어를 시작하기 전, 골든서클부터 돌기로 했다. 골든서클은 싱벨리어 국립공원, 게이시르 간헐천, 굴포스 폭포를 따라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서쪽을 한 바퀴 도는 일정이다. 루트를 따라 몇몇 행선지를 정해두긴 했지만,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탓에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일단 꼭 가보고 싶었던 스트로퀴르 게이시르 간헐천을 목적지로 찍고, 그 길 위에 있는 명소만 들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슈나이펠스네스 반도를 벗어나 내륙에 들어서자마자 나타난 게르두베르크 절벽이었다. 링로드에 들어서기 전, 54번 도로에서 1km쯤 비포장길로 들어가니 사방이 탁 트인 용암 대지 위로 주상절리 절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수천 년 전 분화한 용암이 바닷물에 냉각돼 생겨났다는 절벽은 굵직한 육각기둥들이 500m에 달하게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풍경은 마치 오래전 신들이 세운 성벽 같기도 했고, 어떤 고대 문명의 폐허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시선을 끈 건 절벽 끄트머리에 조용히 자리한 작은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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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외벽에 붉은 지붕을 얹은 교회는 바람 속에 숨어 있다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 하나의 기도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주상절리 절벽과 빨간 지붕 교회의 조합이라니, 이런 풍경을 또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아쉬운 건 역시 빛이었다. 동쪽으로는 드넓은 용암 대지가 펼쳐져 있어, 아침 햇살이 비췄다면 장관이었을 텐데, 하늘은 두터운 구름으로 뒤덮인 채 태양을 내보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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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절벽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웠다. 중국인 커플이 절벽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소품으로 가져온 미니마우스 머리띠와 헬륨 풍선을 꺼내 들었는데, 바람에 날려버리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뒤를 이어 도착한 인도인 커플은 차 문을 열다 바람에 문짝이 꺾이는 통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멀리서, 먹구름이 또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두 시간 남짓 달려 싱벨리어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주위 풍경은 어느새 안개와 비바람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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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첫날부터 날씨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첫날밤 키르큐펠은 내 생애 첫 오로라를 보여줬고, 검은 교회는 붉게 타오르는 일출을 연출했는데, 그 이후로는 내리막이었다. 오전만 해도 구름 때문에 풍경이 살지 않는다고 투덜거렸지만, 이젠 풍경을 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첫날만 해도 그림 같은 풍경이 계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최고의 순간일 줄이야. 정점을 지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스쳐 지나온 것이다.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어봤어야 했다. 셔터 한 번이라도 더 눌러볼 걸. 이토록 날씨가 계속 흐려질 줄, 내 인생처럼 계속 내려갈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 내려가는 중이라면 지금이 가장 높은 순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때인 것이다. 비바람이고 먹구름이고 간에, 지금 내 눈에 담고 있는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유일한 순간이다. 중요한 건 내려감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아닐까.



그때 마법처럼 비가 멎었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지만, 비구름은 조금 전 지나쳤던 언덕 너머로 흘러갔다. 참으로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금세 어두워졌다가, 갑자기 숨통이 트이며 빛을 내쏘는 식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선을 빼앗긴 풍경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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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멎었지만, 공기는 여전히 습했고, 희뿌연 햇살이 구름 사이로 간신히 흘러나왔다.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창고 한 채가 은은한 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뭔가 멜랑콜리하면서도 희망적인 느낌.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도 변덕스러운 날씨에 애초에 기대를 거는 것도, 실망하는 것도 바보 같은 일이었다. 아이슬란드가 보여주는 대로 그냥 바라보고 느끼다 가면 되는 것이다. 얻는다는 건 때로는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측할 수 없는 흐름에 몸을 맡기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열어두면, 운해 위로 솟는 아침 해처럼 ‘지금’이라는 순간이 선연히 떠오른다.




게이시르에 도착하자, 하늘은 반쯤 열려 있었다. 골든서클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이니만큼,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지열지대를 구경했다.

지열지대에 발을 들이자, 땅은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움푹 팬 웅덩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온천수, 유황 냄새를 머금은 흰 증기. 모두가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이끼도 풀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땅 위로 피어오르는 증기와 유황 냄새가 공기를 메우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 밑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마치 거대한 외계 생물의 피부 위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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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다 보니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처음엔 아무 일도 없었다. 김만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고 왜 저렇게 모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거의 10분 다 됐어. 이제 곧 터질 거야.”

그제야 그곳이 스트로퀴르 간헐천이라는 걸 알게 됐다. 주위를 감싼 적막은 마치 숨을 참고 있는 순간처럼 느껴졌고, 수증기 속에서 끓어오르던 온천수는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구멍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물기둥 하나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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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치솟는 물기둥과 그것을 비추는 황금빛 햇살을 상상해봤다. 사방이 트여 있어 일몰과 함께 담아내기만 하면 완벽한 한 장면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짙어지는 구름을 보니 그런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야트막한 언덕과 전망대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 올라가면 지열지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새벽녘, 언덕 위에서 수증기와 물기둥이 피어오르는 풍경 위로 태양이 떠오른다면 얼마나 가슴 벅찰까. 지금 보이는 풍경에 마음속 상상을 덧붙여보았다.


날씨에 대한 기대는 내려놨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물기둥이 좀 더 높이 솟아오르면 좋겠고, 혹시 모르니 일몰까지 기다려볼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곧 모든 게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 순간 황홀한 낙조와 반짝이는 별들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먹구름은 다시 몰려왔고,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케리드 분화구와 굴포스 폭포는 포기하고 골든서클 일정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동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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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두베르크 절벽: Gerðuberg Cliffs

게이시르: Geysir Parking


게르두베르크 절벽 뷰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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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맵에 게르두베르크 절벽을 치면 바로 주차할 수 있는 길가로 안내한다. 길가에 대여섯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절벽 쪽으로 이동하지 않아도 감상하기에 무리는 없다.


스트로퀴르 게이시르 뷰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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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ysir Parking으로 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10분마다 분출하는 스트로퀴르 게이시르는 주차장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전망대는 가보진 못했지만 시간이 된다면 트레일을 따라 올라가 보면 전체 지열지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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