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욕구를 숨기는 일과 배려의 차이
따뜻한 가을 햇볕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5분 남았다. 우리는 곧 강변의 벤치를 떠나 숙소에 맡겨둔 캐리어를 찾고, 공항으로 가야 했다. 그 순간, 강 건너에 있는 카페가 너무나도 가고 싶었다. 당장 저 카페에 가서 흰 천막 아래 테라스에 앉은 사람들 사이에 끼고 싶었다. 진한 카페라테와 함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이 풍경을 즐기고 싶었다. 문제는 카페를 원하는 그 순간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본 여행의 5박 6일을 다 보내고 5분 만을 남긴 때에 나는 짝꿍에게 말했다. "저 카페를 갈 시간이 없어서 속상해. 우울해." 규동을 배부르게 먹고 마지막 여행의 순간을 즐기던 짝꿍은 그 말을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내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짝꿍은 우유를 먹지 않는다. 유제품을 먹으면 늘 얼굴에 트러블이 난다. 나도 시험 준비로 한참 스트레스를 받던 때, 양 볼이 서로 경쟁하듯 여드름으로 뒤덮인 적이 있다. 언제부턴가 여드름이 나지 않지만, 얼굴에 무언가가 난다는 것은 마음을 굉장히 시끄럽게 만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늘 카페라테에 우유 대신 귀리 우유를 넣을 수 있는 카페를 찾아간다.
이번 여행 숙소는 위치가 참 좋았다. 금융거리라 불릴 만큼 직장인들이 많은 곳에 있었다. 관광객 없는 차분한 분위기의 거리에는 적당한 가격의 밥집과 퇴근 후 맥주를 마시기 좋은 가게들이 많았다. 숙소에서 쉴 때 구글맵으로 맛집을 찾아도 찾아도 새로 나왔다. 덕분에 우리는 줄을 한참 서야 하는 핫플레이스에 가지 않고도 맛있는 야키니쿠, 오코노미야키, 오므라이스를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구글맵 레이더에 걸린 것은 강변의 카페들이었다. 낮에도 밤에도 예쁜 강을 따라 카페들이 몇 곳 있었다. 그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곳은 붉은 벽돌이 아름다운 건물과 강변의 풍경을 함께 흰 천막 밑 테라스에서 즐길 수 있는 카페였다. 붉은 벽돌과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푸른 나무, 그 옆을 흐르는 강은 딱 어울렸다. 맞다. 여행의 마지막 5분을 남기고 내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런데 구글맵으로 살펴본 흰 테라스 카페 메뉴에는 귀리 우유가 없었다. 아쉬움을 삼키고 그 카페 옆의, 옆의, 옆에 쯤 있는 카페의 메뉴에서 귀리 우유를 찾았다. 내가 귀리 우유를 찾아 카페를 고른 것을 굳이 짝꿍에게 말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그 카페에서는 붉은 벽돌의 건물 대신 콘크리트 다리가 보이는 것 같았지만 뭐······. 나는 이 카페에서 강을 보고 싶다고 짝꿍에게 말했다.
5박 6일은 생각보다 짧았고 우리는 여행 닷새째 오전에야 내가 원하는 카페를 대체하는 카페에 갔다. 대체 우유를 파는 대체 카페였다.
대체 카페는 생각보다 좁고 사람이 많았다.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꽉 차 있어 자리가 쉽게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강을 볼 수 있는 테라스는 공사 중이었다. 결국 우리는 그곳은 포기하고 나왔다. 그때 흰 테라스 카페가 입가에 근질근질 맴돌았다. 그런데 흰 테라스 카페까지 갔다가 다음 일정을 소화하자니 내 욕심만을 너무 고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곳에는 귀리 우유가 없기도 하고.
결국 우리는 다음 일정 근처의 다른 카페로 갔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서 짝꿍은 일본 파르페가 너무 맛있다며 파르페를 먹고 달달한 파르페와 어울리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이 아닌가. 돌이켜보면 그 순간, 그때 슬쩍 부아가 났던 것 같기도 하다. 귀리 우유 넣은 카페라테가 아니어도 괜찮은 거였어?
마지막 날 일정을 의논할 때 나는 강변 카페 이야기를 다시 말하지 않았다. 나도 내가 그 카페에 그렇게 가고 싶은 줄 몰랐다. 어쩌면 규동을 먹고 그곳을 산책하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갔을 마음이다. 그런데 여행을 5분 남기고 흰 테라스를 보는데 아쉬움과 서운함이 갑작스럽게 밀려왔다. 나도 당황스러울 만큼. 나는 내가 가고 싶은 카페를 양보하고 결국 여행이 끝날 때까지 못 가는구나 하는 낯부끄러운 감정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느껴졌다.
정리되지 못한 채 터져 나오는 감정에 짝꿍은 당황하고 억울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흰 테라스 카페를 가고 싶은지도 몰랐으니 당연하다. 잠시 어색했던 우리는 내 카페라테 이야기를 하고 나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리 우유를 찾은 줄 몰랐다고, 내가 가고 싶은 카페를 못 가서 속상하단 말에 맘이 풀렸다. 결국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 카페가 아니었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내가 해준 배려를 알아주고 고마워해주길 바랐다.
공항으로 가는 기차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숨기는 일과 배려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배려라고 믿으며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짝꿍과 이야기해 보니, 그 배려는 필요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애초에 카페라테가 아닌 아메리카노를 마실 생각이었고, 내가 가고 싶던 그 카페에 함께 가고 싶어 했다.
나는 아직 상대 몰래 멋지게 해주는 배려를 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닌가 보다. 그리고 내 욕구를 숨기는 일은 배려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마음을 숨기고 상대의 마음을 짐작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맞춰보는 걸 먼저 해봐야겠다.
일본 여행의 마지막 날,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