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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 Sep 08. 2024

내 모든 생각이 편견일 수 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제가 신입으로 글쓰기 튜터 활동을 하던 2021년은 여전히 코로나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이 제출한 독서에세이에는 코로나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입니다. 왜 낮에는 멀쩡하게 운영하던 식당들이 9시-10시만 되면 문을 닫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그 글을 읽고 정부의 판단에 단순히 '밤늦게 운영하는 식당들은 무리 지어 모여 술을 마시기 때문인가?'하고 받아들였던 잔잔한 제 생각에 파장이 일렁거렸습니다. 그 학생의 주장도 아주 허무맹랑한 건 아니잖아요. 설사 정말 무리 지어 마스크 없이 오랜 시간 술을 마시기 때문이라고 해도, 야간 영업 제한은 5시 이후 문을 여는 가게 경영에는 타격이 적지 않으니까요. 마스크 없이 무언가를 섭취하는 건 낮이나 밤이나 똑같을 텐데 말이죠.

  '편견'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에 치우쳐진 생각이라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어떠한 근거 없이 한 의견에 대해 그렇다고 믿는 것 또한 편견일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근거도 모르는데, 다른 쪽 견해까지 공정하게 생각할 수 있을리가요. 저 역시 튜터 활동을 하기 전에는 숨을 쉬듯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당연하지 깊이 고민해 적이 극히 드물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겠습니다. 그러나 튜터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학생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생각들을 읽어내면서 '나는 그동안 그렇게 생각했을까'를 고민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라고 생각한 것들 그랬을까 제일 처음 고민한 저를 지독하게 쫓아다니던 '완벽 추구'와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혼나는 것을 이른바 '극혐'해서 정답을 맞히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소한 혼남에도 마음이 서러워져서 어떤 행동을 하면 부모님이 좋아할까, 어떤 말을 하면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을까 온 관심을 쏟았던 기억이 납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덕분인지 또래와 달리 성숙하다는 말을 곧잘 듣곤 했습니다. 그 말을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말을 억누르고 있는지 그 나이엔 전혀 느끼지 못했죠. 어떤 친구들은 어른들과 대화하는 게 너무 어렵다고 말하곤 했지만, 저는 적어도 어른들의 질문에 답을 찾는 게 아주 쉽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특히 학업과 관련된 문제들은 너무도 쉬웠어요. ‘모범생’이라고 칭하는 몇 가지 행동들을 하면 적어도 겉으로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생각과 전혀 달라도 '모범적' 답변을 하면 더 이상 깊이 묻지 않았거든요. 구태여 논란을 일으키거나 상처를 줄 수 있는 솔직한 말을 하지 않았던 건 그냥 그런 이유였을 뿐입니다. '모범생 이미지'를 수단으로 꼭 맞는 정답을 도출해 내곤 했던 것은 제게 ‘완벽함’과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강박을 심어줬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얻는 결과물들이 너무도 달달했거든요.


  모범생이라는 이미지가 학교 생활을 할 때 도움이 되는 수단이라는 걸 머릿속에 박게 된 것은 한순간에 불과했습니다. 초등학교 1~3학년 정도 되었을 무렵, 규칙과 질서에는 엄격한 여자 영어 선생님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영어 숙제를 검사 맡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교탁 앞에 한 줄로 줄을 섰고, 제 차례가 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민서는 선생님이 영어 숙제 검사 안 할 거야."

  당황스러웠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왜 검사를 안 하시겠다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심장이 크게 쿵쾅거렸습니다. 

  "민서는 어차피 숙제했을 거니까, 숙제 검사 안 해. 민서는 자리에 들어가."

  잘못한 건 아니어서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들어가면서 작지만 어쩐지 따가운 시선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죠. 

  ‘선생님, 저 숙제 안 해서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랑 같이 겨우 했어요.’

  얼떨떨했지만, 그와 동시에 이 상황이 웃겼습니다. 같이 쉬는 시간에 숙제를 했던 친구들과 제가 다른 점은 그저 '모범생인가 아닌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숙제를 하지 않은 채로 조마조마하며 줄을 섰더라면 얼마나 더 웃긴 상황이 되었을까요. 그래도 유독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다는 느낌은 ‘겸손해야 한다.’는 정답 앞에서도 기쁨을 감추기 힘들었습니다. 마치 특별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달까요. 그래서 가능한 한 완벽해야 한다는 것과 열심히 해야만 한다는 건 저에게 진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듯 제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살아왔던 것의 민낯을 풀어헤치고 나니 실소가 나왔습니다. 마치 하느님이 썼다고 믿은 성경이 실은 하느님의 말을 듣고 다른 누군가가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같았거든요. 이렇듯 당연하다고 믿었던 걸 왜 당연하다고 믿었는지 고민해 본 적 있나요. 없다면 한 번 해 보시길 바랍니다. 특히 자신을 괴롭히는 믿음에 대해 왜 그렇게 믿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믿음을 단순한 편견이 아닌 삶을 지탱할 견고한 믿음으로 만들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오늘은 사회적으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기는, 혹은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들의 기준치인 '평범'에 대해 쓴 글을 가져와 봤습니다. 


글 제목: ‘평범’ 프레임을 위해, 오늘은 몇 번의 거짓말을 했나요

부제목: 손원평 작가의『아몬드』를 읽고     

 교복 입는 학생 시절, ‘책벌레’, ‘공부를 곧잘 하는’, ‘책임감 있는’ 등의 수식어는 늘 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사회라는 무대에서 타인이라는 관객에게 정해진 연기를 하는, 삼류배우가 된 느낌이 들었다. 실은 나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아무 의미 없이 따랐을 뿐이었다. 자존심이 세서 혼나는 것을 더더욱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해라.’ ‘수업시간에 졸지마라.’ ‘선생님께 질문해라.’ 등의 요구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나에게는 모범생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졌고 친구들은 나에게 ‘책벌레’라는 별명을 붙였다. 스스로 배우가 되고 싶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배우처럼 연기하게 되었다. 사회에서는 나와 다른, ‘김민서 배우’가 활동하고 있는 셈이었다. 모범생 프레임처럼, 사회가 만든 프레임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 모범생 프레임은 그나마 긍정적이다.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아몬드』의 곤이 같은 학생에게는 ‘그런 애’라는 프레임이 씌워졌다. ‘그런 애’라는 프레임은 소위 어딘가 문제 있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했다. 아마 곤이가 거짓으로 모범생처럼 행동했다면 학교는 거짓임에도 전혀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는 평범함의 기준을 세운다. 그리고 평범을 기준으로 한 몇 가지 데이터를 토대로 누군가에게는 모범생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누군가에게는 소위 ‘그런 애’라는 프레임을 씌워 구분 짓는다. ‘평범’이라는 표현은 방패가 되어 거짓된 행동이어도 평범함을 위해서라면 용인된다. 또한 평범 외의 범주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O,X 퀴즈를 푸는 것 마냥 평범과 다른 사람은 소위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일축한다. 

  평범을 기준으로 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사회에서 평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언제나 마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취감경’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나영이 사건’의 조두순의 경우 주취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해 주취감형을 받았다. 그동안 ‘주취감형’은 평범한 것이었기 때문에 심신미약으로 인정된 사례였다. 물론 지금은 주취감형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만연하지만 법으로 정리된 문제는 아니다. 이처럼 숨 쉬듯 쉽게, ‘평범’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한다. 평범에 대해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모범생이지만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과 그런 애이지만 감정에 솔직한 사람 중에 누가 진정 평범한 것일까, 아니면 둘 다 평범하지 못 한 걸까. 그러면 평범한 사람이 있기는 할까.’ 

  나는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의 정의를 내리지 못할 바에는, 그런 애매모호한 평범을 요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마치 몇 년 전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요즘에는 ‘청춘이 왜 아파야하냐.’고 반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를 속이고 모두를 속여 평범하게 될 바엔 차라리 평범하지 말자. 그 대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평범한 걸로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모두가 애초에 평범한 걸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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