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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 Apr 27. 2024

묻어 둔 상처는 언젠가 드러난다

글이 살린 삶, 글을 써야 하는 이유

  10대 시절, 저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어요. 무관심하거나, 어딘가 모르게 날이 서 있거나.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그런 상태로 삶을 살다가 저도 모르게 우울에 빠져 허우적거렸거든요. 어쩔 때는 이유 없이 수면으로 올라갈 때도 있었고, 또 이유 없이 다시 해저로 빠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유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그때는 제 마음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돼먹은 성격이라고 생각했어요. 남들보다 자주 이유 없이 우울하고, 또 잠시 괜찮아지길 반복하며 사는 좀 힘든 성격이요. 네, 10대의 저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도, 다뤄내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데는 달인이었죠. 그래서 제가 그런 감정을 겪었다는 걸 주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말수가 적고 표정 변화가 적은 건 ‘어린애 치고 성숙하다.’라고 판단하기 쉬웠고, 덕분에 감정에 잘 휘둘리지 않는 어른스러운 아이라고 평가받는 게 취미였습니다.




  한 번은 그런 일도 있었어요. 같은 반 친구 R이 저에 대해 ‘엄마 믿고 나대는 애’라고 말하고 다녔던 일이요. 친구 R은 저에 대해서만 뒷말을 했던 건 아니었는지 학년 전체에 R과 있었던 이야기들로 작은 시골 학교가 시끄러워졌습니다. 그렇게 되니 담임 선생님께서 부반장이었던 저에게 사건의 전말과 의견을 물으셨죠. 저와 관련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담임 선생님이 물으시는데 별수 있나요. 제가 어떤 말을 들었는지, R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은 어떤지 등 물으시는 질문에 답해드렸죠. 근데 제 이야기를 잠잠히 듣던 선생님이 딱 한 번 되물으시더군요.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아?"라고요. 그 말을 듣고서야 제 안의 무언가가 요동치는 걸 느꼈습니다. 겨우 감정을 누르고 선생님과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누고 나와 문을 닫았어요. 그리고 저는 문 앞에서 눈물을 쏟았고, 자습실로 걸어가는 내내 울었습니다. 네, 저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던 거죠. 자습실 앞에 다다르자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이 차갑게 말랐어요. 덕분에 무표정으로 R이 있는 자습실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선생님과 이야기했다는 걸 알았는지 R은 제 앞에 냉큼 와서 사과를 했습니다. '네 어머니가 학교에 자주 오시는 게 부러웠어. 널 질투해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어.' 가당치도 않은 변명에 제가 한 말은 '괜찮다'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도 제가 괜찮은 줄 알았어요. 예전처럼 친한 친구, 그러니까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친구까지는 아니어도 동급생으로서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저희 사이는 다시 친구로 돌아간 듯했죠. 그 뒤로 R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도 즐겁지가 않은 겁니다. R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엄마 믿고 나대는 애'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고,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했는데 나랑 같이 놀 수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떠나질 않았어요. 제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고, 분위기도 당연히 좋지 않았어요. R에게 더 이상 친구하기가 힘든 제 솔직한 마음을 말해야 할까, 오늘은 참고 끝까지 놀다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일찍 나왔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생각은 멈추질 않았어요. 그 길에서 제가 내린 결론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생각보다 내가 R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것. 두 번째는 그로 인해 크게 상처받았다는 것. 마지막은 더 이상 R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R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려고 하는 일말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로 포기했던 겁니다. 제가 R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나는 널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뒤로 말하고 다녔다는 그 말을 듣고 너무 상처받았다.'였는데, 괜찮지도 않으면서 '괜찮아'라고만 말했죠. 상처받고 속상한 제 마음에 탓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위로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묻어두기만 했습니다. 마음과 다르게 행동한 건 그 일뿐만이 아닙니다. 그림을 하고 싶을 때도 제 입에서는 '원래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싫어진대. 나는 그림으로 평가받는 게 싫으니까 취미로만 할래.'라고 했어요. 그 말을 하면서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데 말이죠. 게다가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칭찬을 받았을 때 입술을 피나기 직전까지 깨물면서까지 웃음을 참으려고 했던 적도 있어요. 슬픔이든, 화든, 서러움이든, 기쁨이든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감정은 그저 묻어둬야 한다고 여겼어요. 그렇게 제 마음에는 무덤이 하나하나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덤이 너무 많아져 무덤 위에 또 무덤을 만들었던 걸까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묘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정말로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무덤에 균열이 간 건 대학교 2학년 무렵입니다. 남들은 다 슬프다는 영화를 봐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던 제가, 평소라면 상처도 받지 않을 가벼운 장난에 눈물을 쏟고, 밤에도 꼭 울면서 잠에 들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매일매일 하게 된 지 일주일이 됐을 때 유튜브에 '우울증 증상'을 검색했습니다. 제가 정신과에 가야 하는 상태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죠. 체크리스트에 의하면 당시 제 상태는 가벼운 우울, 그러니까 중증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더라고요. 묻어둔 감정들이 폭발한 겁니다. 저는 약을 먹어야 하는 우울이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에게만 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 트라우마적인 사건을 겪지 않는 제가 겪는 우울은, 그냥 사람이라면 당연하게도 모두가 갖고 있는 거니까 심각하지 않은 거라고 여겼죠. 그런데 심각하지 않다고 여겼던 제 우울은 점차 수십 번씩 살기 싫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깊은 물을 보면 빠지고 싶고, 높은 건물에 있으면 뛰어내리고 싶고, 차를 타면 문을 열고 떨어지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걸 찾으면 죽지 않을까 싶어서 안 해 본 것들을 하기도 하고, 삶의 목적이 명확해지면 살고 싶을까 싶어 열심히 목표와 꿈을 설정해 봤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는 잠시 괜찮아질 뿐이었어요. 마치 조울증처럼 하루에도 기분이 날듯 좋아졌다가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했고, 결국 지칠 대로 지쳐버렸습니다. 이때 한 수업에서 에세이 쓰기 과제를 받았습니다.


  L교수님께서 이왕이면 타인에게 말하기 가장 힘든 걸 써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대번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삼촌의 장례식장에 가지 못한 날이 떠올랐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날이요. 그날을 글로 쓰려니 어쩐지 어색하고 습관처럼 남에게 말하는 게 싫어서 다른 걸로 쓰려고도 해 봤지만, 실패했습니다. 저에게 가장 아픈 경험을 써 보자고 처음으로 결심했습니다. 쓰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그날을 떠올리면 눈물부터 나왔거든요. 몇 자 쓰고 울고, 또 몇 자 쓰고 우는 걸 반복했습니다. '아, 이래서 이거 쓸 수 있겠나' 싶더라고요. 도저히 가족들이 모두 깨어있는 낮에는 쓸 수가 없었어요. 우니까 도서관이나 카페 같은 곳도 갈 수가 없었죠. 제가 선택한 건 밤에 쓰는 거였습니다. 가족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 되면 홀로 노트북을 켜고 침대에 앉아서 아무도 몰래 울면서 에세이를 썼습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조심 타자를 쳤습니다. 그렇게 며칠 밤을 새우면서 에세이 초안을 작성한 후, 퇴고를 위해 에세이를 읽을 때도 어김없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면서 에세이를 완성했습니다. 그 에세이를 제출할 때 기분이 참 묘했어요. 후련하기도 하고, 어쩐지 내밀한 비밀을 들킨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걸 읽은 L교수님의 반응은 어떠실지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L교수님이 글쓰기 교실을 담당하고 계셔서, 튜터 활동을 할 때마다 마주치거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세이를 제출한 무렵이 기말고사 즈음이어서 바로 L교수님을 뵙지는 않았습니다. 대학생은 마지막 기말고사 시험을 치르면 바로 종강이거든요. 제가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바로 기숙사 짐을 빼고 본가로 내려갈 겁니다. 그런데, 어라? 다음 학기 튜터 모집에도 선발돼 버렸어요. 그러면 기숙사 짐을 빼기는커녕 방학 때 운영되는 기숙사로 짐을 옮기고, 2주 정도 방학 중 튜터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튜터 교육은 L교수님이 하시는 거죠... 하하하. 그때 저는 반쯤 포기하고 L교수님의 어떤 반응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했어요. 딱히 거창한 준비는 아니고, 마음의 준비만 했습니다.


  L교수님은 교육 때 별 다른 말씀이 없으셨어요. 아직 검사를 안 하신 건지, 읽으셨는데 저에게 따로 하실 말씀이 없으신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어떤 반응을 기대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의 가장 아픈 부분을 남에게 보여준 게 처음이라서요. 그렇게 한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2주간의 교육이 끝날 무렵, 마지막 교육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향하는데 교수님이 잠깐 부르시더라고요. 그리고는 꼭 안아주셨습니다. 제가 가진 옷 중 가장 두꺼운 파란 롱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롱패딩을 뚫고 뜨거운 온기가 느껴질 만큼 꼭 안아주셨어요. 마음의 준비는 했었지만 안아주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어버버 하느라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등을 쓸어주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고생했다는 말도 얼핏 들었어요. 그때 '아, 읽으셨구나.' 했습니다. 그 뒤에는 밝게 싱긋 웃어주셨어요. 그 웃음에 저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교수님이 그런 걸 썼다고 뭐라 하시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긴장했던 이유는, 아마 그 글을 쓰는 거 자체가 '용기'를 낸 일이기 때문일 거예요.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아실 겁니다. 저는 더 이상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매일이 죽고 싶고, 아주 가끔 살고 싶다 생각했는데 말이죠. 여전히 삼촌의 장례식에 못 간 그날의 일로 눈에 물이 도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타인에게 말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떠올리기만 해도 펑펑 울었던 걸 생각하면, 괜찮은 변화 아닌가요. 그럼 이제 전혀 우울하지 않고, 슬픈 일이 없냐고요? 에이, 그건 아니죠. 여전히 때로 힘들고 슬프지만, 저는 이제 건강하게 이겨내는 방법을 압니다. 바로 글로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는 겁니다. 어떤 것 때문에 힘든지 글로 써 보면 명확해지고, 해결방법이 나와요. 제 마음도 '아, 이래서 힘들었구나. 속상했겠네.'하고 좀 더 들여다볼 수 있고요. 그러면 타인에게 제 힘듦을 공유할 수 있는 여유도 생깁니다. 제가 겪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으니 타인의 의견을 들었을 때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바로 세워지죠. 특별하게 돈을 들이는 것도, 특이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글을 쓰고 마음을 돌보는 것만으로 한때는 숨쉬기도 싫었던 삶을 사는 게 괜찮아지더라고요.


  삶을 사는 데 고통이 없을 수는 없죠. 더구나 지금 시대가 살기에 더없이 좋은 때라고 말하기도 힘든 것 같아요. 남보다 잘 살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펼칠 수 있는 돈과 명예도 있어야 하는데, 고물가에 돈은 모이지 않아서 부모 도움 하나 없이 '잘' 사는 게 어려운 시대잖아요. 나와 나, 나와 타인 간의 인간관계 문제도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고요. 이럴 때 고통을 건강하게 인식하고 나름대로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삶을 살아가는 데 든든한 힘이 됩니다. 저에게는 그게 '글'이었죠. 그런데 고민해 보니 글만 한 게 없는 것 같아요.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방법을 찾아주는 게 또 뭐가 있겠어요. 그나마 괜찮은 게 '대화'이긴 한데 말은 글보다 명확하지 않기도 하고, 어차피 적어두지 않으면 기억나지 않잖아요. 게다가 내 문제를 그만큼 잘 들어주는 사람을 고르는 것도 일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그 누구도 없을 수도 있고요. 그래도 글 쓰는 게 너무 어렵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튜터를 하면서 알게 된 글에 대한 진실들을 알려드릴게요. 그 진실들을 알게 되면, 누구나 쓰실 수 있습니다.



  저에게 글쓰기는 치유의 힘이 있다는 걸 알려준 L교수님의 과제, 기억하시나요? 저에게는 용기였던 그 에세이를 여기에 두고 갈 테니 여러분에게도 글을 쓸, 혹은 삶을 살아갈 용기가 되길 바라요. (그 글이 현재 저에게 없네요... 본가에 두고 온 외장하드에 있을 테니 다음 주 본가에 가서 찾으면 이어 붙여 둘게요. O. <)


  글 제목: 소리 내 우는 법을 잊은 사람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6시 20분 즈음 9교시를 마치면 책상에서 가방을 거칠게 빼 들고 너 나 할 것 없이 급식실로 달렸다. 먼저 도착한다고 해서 밥을 많이 먹는 것도 아닌데 빨리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시험 기간엔 그렇게도 중요했다. 급식실에서 줄이라도 서면 손에 들고 있던 책이나 노트를 펼쳐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구들과의 즐거운 수다는 사치처럼 느껴지고, 가벼운 말을 거는 것조차 피해를 끼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함께 길을 걷고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제대로 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는 그 시험 기간의 모습들이 기형적으로 느껴졌다.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아야 한다는 그 모습이 마치 목숨에 경각이 달린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기형적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 남들보다 빨리 밥을 먹고 면학실에 가면 70~80년대 미싱 공장을 연상시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책상과 의자가 일정하게 간격을 맞춰 줄지어 널따란 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미싱기만 올려놓으면 정말 공장 같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만큼 같은 색을 한 책상과 의자, 그리고 신경에 거슬리도록 환한 빛만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아마 교도소 방도 그것보단 더 다양한 물건들이 있겠다 싶었다.

  그날은 언제 제대로 청소되었을지 모르겠는 히터의 열기가 공기 중에 맴돌고 있었다. 히터를 틀어놔도 공간이 넓어서 그런지 따뜻하지 않아서 빨간 교복 마이를 그대로 입은 채로 책상에 앉았다. 면학 시간이 시작하기 전에 노트북을 켜고 배경화면 한구석에 있는 SNS 아이콘에 커서를 갖다 댔다. 접속하려다 그냥 노트북을 꺼 버렸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면 괜히 힘든 마음이 커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만 매몰될까 봐. 그렇다고 다 괜찮다는 거짓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그랬다. 힘든 상황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지만, 이유 없는 당위 같은 자존심에 도망치는 건 싫었다. 그런 이중적인 감정이 커질 때 처음엔 사회로 화살을 쏴 댔지만, 반복될수록 그 화살은 나를 향해 있었다. 모두가 힘든 건 마찬가지인데, 왜 나만 이렇게 견디지 못할까. 다 공부하는 내용인데 나는 뭐가 힘들다고 공부에 집중하지 못할까. 나는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손은 책을 펼치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질문의 모습을 한 자책만 떠올렸다. 결국 책의 한 문장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 되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밖이 어두워져 검어진 투명 창이 보였다. 검은 창 안에 고개를 든 내가 비쳤다. 고개를 창으로 돌려봤자 책상에 앉아 고개를 숙인 학생들 사이에서 홀로 고개를 든 내 모습만 다시 비칠 뿐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헛헛해졌다. 

  쉬는 시간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트북을 켜 SNS에 접속했다. 보통 일주일에 4번 정도는 엄마와 쉬는 시간에 연락하곤 했기 때문에, 엄마와의 대화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왔음을 표시하는 빨간색이 떠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들어간 대화방에는 내가 믿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있었던 말이 쓰여 있었다. 중환자실에 계시던 삼촌이 돌아가셔서 서울로 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학교에서 나를 데리고 올라갈 거니까, 담임 선생님께 전화하라고 했다. 하지만 쉬는 시간은 고작 10분이었고, 담임 선생님도 퇴근한 직장인이셔서 그런지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다음날에, 그다음 날에도 내게 왜 전화했었냐고 묻지 않으셨으니까. 결국 부모님은 나를 두고 먼저 올라가야겠다는 내용을 남기셨고, 또 얼마 되지 않아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3일장이기도 하고, 민서는 시험 기간이니 장례식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으니 학교에 있으라는 답이 왔다.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공부에 집중하는데 방해된답시고 왜 카톡을 면학 1교시 전에 열어보지 않았을까 자책했다. 친구들이 왜 우냐고 물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카톡을 너무 늦게 봐서 삼촌의 장례식조차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울기만 하는 나를 계속 다독이기엔 무리가 있는, 친구 저 하나 버티기도 버거운 가혹한 시험 기간이었다.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채로 숨죽여 울다가 면학 2교시가 시작됐다. 휴지도 없어서 거친 소재였던 교복 마이로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마음이 아픈 거에 비하면 쓸리는 피부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우는 와중에도 높이가 낮은 책상 때문에 마주 앉은 친구와 눈이 마주칠까 고개도 들지 못했고, 행여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터져 나오려 하는 울음을 꿀꺽꿀꺽 억지로 삼켰다. 그러면 이따금 심장이 저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우는 게 창피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시험 기간에 괜히 피해가 될까 걱정한 거였다. 개미의 움직임만 아무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미치도록 조용한 면학실이 내게 내려진 형벌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있는데도 너무나 조용한 그 공간이 이상하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뇌출혈로 두 번째 쓰러진 삼촌은, 설상가상으로 늦게 발견되어서 병원에 갔던 터라 다시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이었다. 중환자실 면회는 제한되어 있고, 너무 부어서 삼촌처럼 안 보이는 정도이니 구태여 만나러 가지 말라고 어른들은 말렸다. 그럴 때마다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이번에는 돌아가실 것 같다고 느끼는 내 직감이 너무 소름 끼쳤다. 직감이 틀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믿지 않는 신에게 매일 기도도 하고, 왜 삼촌에게 그랬냐며 신한테 화도 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정신없이 울다 보니 평소엔 길다고 느껴졌던 면학 시간도, 취침 전 점호 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소등 후 2층 침대 위에 누워 이번엔 룸메이트의 잠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또 울음을 삼키면서 울었다. 그다음 날에는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과 학교생활을 했다가 슬픈 감정이 떠오를 때마다 조용히 눈물 흘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울게 되었다. 

  물감을 묻힌 붓을 흔들지 않고 슬며시 맑은 물에 넣으면, 천천히 결을 만들며 퍼지는 물감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붓에 묻은 물감은 아주 천천히 오래도록 물에 스민다. 그러면 어느새 물은 물감들의 색깔로 변해 있다. 그날의 감정은 붓에 묻힌 물감처럼 남아 있다. 아주 미세해서 남아 있다는 게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 다 씻기지 않은 상태처럼 말이다. 약 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혼자 아파하느라 고통을 느꼈던 그 감각의 순간들이 생생하다. 장례식에 가지 못해 삼촌에게 미안한 감정과 애도는 어느 정도 매듭을 지었지만, 이따금씩 그날이 불쑥 떠오를 때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털어놓으면 괜찮을까 싶어 ‘그때 그랬노라’라고 시원하게 말하고 싶을 때가 있어도 눈물만 앞서게 되어서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글로도, 말로도, 그 누구에게도 털어내 본 적 없이 마음에만 담아 뒀었다. 그리고 소리 내 울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사람 마냥 소리 내 우는 행위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붓을 물에 강하게 저어서 모든 물감을 없애야만 할까? 과거의 나는 감정은 소모적인 행위일 뿐이므로 일정 시기가 지나면 없애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살필 줄 아는 지금의 나는 그게 옳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하게 저어봤자 젓기 이전의 투명한 물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감정을 없애버리는 것보다 중요한 건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라고 믿는다. 감정을 누르고 삼키는 행위가 당장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감정은 말 그대로 나의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반응이다. 아무리 감정을 숨길 수 있다고 하지만 슬플 때 울고, 웃길 때 웃는 감정은 어떤 진솔한 말보다 가장 솔직한 내 상태를 대변한다. 그렇기에 감정을 인정하는 것은 곧 나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그 아픈 기억을 지우기보다 충분히 아플 수 있었다고 다독이면서, 그저 소리 내 울어도 되는 슬픈 ‘나의 조각’으로 남겨 두자고 마음먹었다. 글을 마치기 전에, 또 다른 소리 내 우는 법을 잊은 사람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제가 소리를 삼키면서 울어보니까요, 정말 심장이 미친 듯이 아파요. 그냥 그만큼 아프다는 게 아니라, 정말 심장에 통증을 느껴요. 그리고 그게 더 아픈 이유는 또 있어요. 크게 울면 후련하기라도 하지, 슬플 때 소리 내 울지도 못하면 내 모습이 그렇게 처량하고 불쌍해 보여요. 크게 우는 게 뭐 큰 대수라고 고작 그것도 못하는 모습에 더 슬퍼지거든요. 저도 그걸 알게 된 후로는 혼자 있을 때 울적한 마음이 들면 그냥 냅다 소리 내 울어요. 처음엔 엉엉 울지도 못하고 병 걸린 사람처럼 옅은 비명 비슷한 신음 소리가 나더라고요. 이것도 하면 할수록 느는지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저는 다른 사람이 다 쳐다봐도 감정에 솔직해서 그냥 울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욕할지라도 그건 그들의 생각일 뿐이죠. 그 사람들의 생각이 내 감정보다 중요한가요. 정 피해 끼치는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이 너무 신경 쓰이면 잠시 참았다가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에서라도 크게, 엉엉 우세요. 만약 ‘아이처럼 뭐 그런 걸 가지고 우냐’, ‘감수성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라고 비꼬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비웃어버리세요. 뭐 아이일 땐 우는 게 당연하고 어른이 되면 갑자기 슬픔이라는 감정이 없어지기라도 하나요. 그럼 커 갈수록 눈물샘이 퇴화되게요? 그렇지 않다는 거 잘 알잖아요. 그리고 비꼬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잘났다고 타인의 감정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말을 하나요. 그런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아도 됩니다. 슬픈 당사자가 잘잘못을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자신이 잘못한 경우는 사실 많지 않아요. 그러니 자책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지 마세요. 울고 싶을 땐 울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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