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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 Apr 09. 2024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야

글쓰기 튜터에 지원한 이유 (첫 독서에세이, 다만 익숙함에서 구하소서)

  2023년을 돌이켜 보면 2020년의 저는 상상도 못 할 것들에 도전하며 살았습니다. 2월 겨울방학엔 얼굴 보러 가겠다는 여름의 약속을 지키러 프랑스로 훌쩍 떠났고, 7월 여름방학엔 말레이시아 한 달 어학연수에 지원해 뜨거운 여름을 보냈습니다. 학기 중에는 튜터로서 학생들의 글을 첨삭했고, 취업 준비를 위해 토익시험 응시, 드론조종 3종 자격증, 포토샵 1급 자격증 등을 취득하기도 했죠. 그리고 그 해 성적은 전부 4.5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2020년, 그러니까 그 당시 스무 살이었던 저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삶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본인의 첫 20대, 그러니까 법적으로도 성인이 되는 스무 살의 모습을 어떻게 상상하셨었나요. 고등학생 시절 제가 상상하는 스무 살은 '살랑살랑, 간질간질', 그 말 자체였습니다. 영화 속 대학생들의 생활처럼 서투르지만 뜨겁고, 미숙함마저도 청춘이라 아름다워 보이는 그런 로맨틱 코미디 장면이요. 하지만 제 스무 살은 그런 핑크빛 장르가 아니었습니다. 박진감 넘쳐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액션도 아니었고요. 서늘한 분위기를 물씬 풍겨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스릴러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영화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장르였어요.


  원래대로라면 2020년은 새로운 시작에 설레었을 해였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 친구는 동기, 수업은 전공과 교양, 선생님은 교수님이 되잖아요. 하지만 갓 성인이 되어 한 발을 내딛는 저 해에 저는 불안에 떨다 못해 무력함을 느끼고, 그렇게 죽은 듯이 하루를 살았던 기억뿐입니다. 옆 나라 병원의 복도에 방치된 죽은 몸을 보도하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흰 천을 덮는 것마저 지금의 상황에서는 사치라는 듯 어설프게 덮여 시신의 일부가 보였습니다. 곧이어 한 도시 전체가 봉쇄된다는 소식도 들려왔죠. 영화 드라마 속에서나 벌어지던, 그러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전염병의 시대가 제가 살고 있는 지금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본가에 머물면서 고등학교 졸업식을 기다리던 저는 그대로 졸업식도, 입학식도 없이 대학생이 됐습니다. 옆 나라의 병원에만 있는 줄 알았던 혼란은 제 대학교 입학 무렵에도 빚어졌습니다. 언제쯤 개강을 하는 건지, 기숙사는 신청해야 하는 건지, 대면으로 수업을 진행하는지 여부가 긴박하게 공지되었습니다. 결국 비대면 강의가 결정되었고, 그렇게 저의 대학교는 작은 제 책상 위 더 작은 노트북 속 화면이 전부였습니다. 교재를 펼쳐 두고 강의를 듣던 고등학교 야자 시간과 다름없었습니다. 간간히 비대면 실시간 수업을 하기도 했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수동적으로 영상 강의를 듣기만 하는 게 대학 공부가 맞는지, 고등학생 때와 달라진 게 있긴 한 건지 몰라 점점 공부에 흥미를 잃어갈 때 즈음이었습니다. 난생처음 ‘독서 에세이’라는 걸 필수 제출 과제로 받았습니다. 독서 에세이가 뭔지, 독후감과 다르다고는 하는데 뭐가 다른 건지 모르는 채로 일단 책부터 읽었습니다. 세상에 내가 안 읽은 책이 이렇게 많다는 걸 감탄하며 권장도서 목록에서 김택환 저 <거짓말이다>라는 책을 겨우 골랐습니다. 펼치고 보니 세월호 잠수부의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알고 고르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책은 제목을 보고 내용이 궁금해지는 걸로 고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독서 에세이가 무엇인지 대강 이해하고 독서 에세이를 작성하면서 겪은 갖은 고난은 생략하고 결과만 말해 보겠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글로 풀어썼고, 그 결과 <기초글쓰기> 과목에서 A+를 받았습니다. 교수님께서 직접 평을 남겨주시는 2차 첨삭 때 글쓰기 튜터에 지원해 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죠. 네, 제가 글쓰기 튜터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순간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글쓰기 튜터에 지원을 고려하게 된 이유는 독서 에세이를 작성할 때 겪었던 고됨 때문이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세월호가 저에게 갖는 의미를 치열하게 고민했고, 토해내듯이 글을 써 내려갔다가 세세하게 뜯어 읽으며 수정하는 걸 반복했습니다. 이때 저는 살아있다고 느꼈어요. 독서 에세이를 쓰는 시간만큼은 집에만 있다가 업로드되는 강의를 듣는 공부 로봇이 아니라, 생각하고 고민하고 표현해 내는 ‘진짜 사람’ 같았습니다.


  그제야 제가 고등학교 3년 동안 시험 기간을 제외하고 매주 영화 저널을 쓰던 사람이라는 게 떠올랐습니다. 매주 한 편의 영화를 보고 하나의 주제로 저널을 썼거든요.  다른 친구들은 힘들어하기도 했는데, 저는 그 동아리 활동이 유일한 숨통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것들 중 하나였죠. 이쯤 되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글 쓰는 걸 좋아하고, 또 그리워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프로 겁쟁이인 저는 끝까지 지원할까 말까 고민했어요. 그런 저를 본 호랑이띠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서야,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야.’ 네, 그 말을 듣고 문득 썩기 싫다는 생각에 꽂혀서 바로 글쓰기 튜터 지원서를 작성했습니다. 이게 제 3년간의 글쓰기 튜터 활동의 시작입니다.


  혹시 제가 경험했던 ‘죽음’ 같은 시간들을 현재 살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불안하고, 무의미하고, 무력한 시간이요. 일상에 잔재하던 이 세 가지를 생활에서 몸소 느끼게 하는 데 코로나가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저는 느낍니다. 마치 평소에는 땅속에서 잠들어 있다가 어떤 충격으로 크게 폭발하는 화산처럼 말이죠. 지금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로 살고 계신다면, 과거의 저와 같으시네요. 다음 글에서 제가 어떤 사람이었고, 글쓰기 튜터를 하며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저, 남들의 생각보다 많이 아팠고, 또 남들이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위태로웠거든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스무 살 끝 무렵, 글쓰기 튜터 지원서를 작성하며 저는 더 이상 고여 있지 않고 어디로든 흐르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저의 첫 글쓰기 튜터 장학생 지원 서류에 작성했던 튜터 지원 동기 및 각오와 독서 에세이로 이번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5. 튜터 지원 동기 및 각오

  저는 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영화저널을 쓰는 동아리에서 활동했습니다. 글로 표현하는 일을 즐기고 그 과정을 통해 생각을 발전시키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글쓰기는 고등학교 때 압박감으로 가득했던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나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글을 쓸 때마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무언가 더 성장 하고픈 갈증을 느껴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생활하면서 그 갈증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글로 표현하는 일에 있어서는 특히 나아가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동상이 된 것 마냥 머물러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저를 움직이게 한 것은 기초글쓰기 수업입니다. 수업에서 글쓰기의 기본을 배우고 좋은 예시의 글을 읽는 과정은 저에게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교과서에 실린 글들처럼 짧을지라도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을 진정성 있게 풀어내는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피어났습니다. 그렇게 수업에서 배운 점을 토대로 책 ‘거짓말이다’를 읽고 세월호의 ‘익숨함’에 대한 글을 썼으며, 꽤나 좋은 평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주시경대학생에세이대회의 본선에 진출하는 좋은 기회도 얻었습니다. 비록 수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여전히 실력을 쌓아가야 한다는 깨달음과 실패의 경험을 성장의 전환점으로 삼고자 글쓰기 튜터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튜터는 일정한 글쓰기 교육 과정을 거쳐 1학년 학생들의 글을 읽고 첨삭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튜터가 교육을 통해 스스로 배움을 터득하는 동시에 새로이 글을 시작하는 1학년 학생들에게 도움을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글쓰기로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학교생활에 더없이 좋은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또한 도움을 전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잘 쓰고 못 쓰고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글을 읽어볼 수 있는 것도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거름이 될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마법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는 프랑스어인 ‘Avec plaisir (즐겁게, 기꺼이 하다)’를 마음에 담고 글쓰기 튜터로서 차근차근 내적 성장을 이루며 더불어 도움을 전하는 활동을 할 수 있음을 약속드립니다. 




글 제목: 다만 익숙함에서 구하소서

도서 정보: 『거짓말이다』(김탁환)

  “별일 아니야, 수업이나 하자.” 제가 중학교 1학년이었던 2014년의 따스한 봄날, 익숙한 교실 안에서 평소와 같지 않은 풍경이 하나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 교실 한구석에서 선생님들이 모여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겁니다. 선생님들께서 하시는 이야기에 어른 세상의 이야기이겠거니 하며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 와중에도 무표정한 얼굴에 '어떡하냐'라는 낮은 목소리의 물음이 시끄러운 분위기 사이에서 귀에 박혔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는지 붙임성 좋은 한 친구는 선생님들의 이야기에 궁금증을 표하기도 했습니다만, 선생님들은 그저 별일 아니라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세월호는 침몰 중이지만, 탑승객은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본 뉴스는 전혀 별일 아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뉴스를 보고 나서야 선생님께서 무얼 말하려 하지 않았는지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배가 더 커다란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중이었습니다. 그 자체로 무척 무서운 광경이었습니다만 탑승객이 모두 구조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지난 상황이 무사히 정리됐음을 다행이라 여기며, 뉴스에 나오는 사고 현장을 보고 있던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 곧 전원 구조가 아니라는 정정보도가 나왔습니다. 뉴스가 한순간에 ‘전원 구조’에서 ‘실종자 및 생존자 수’로 바꾸어 보도하는 것을 목격하며 한동안 ‘이 모든 게 사실일까?’ 두 눈을 의심했습니다. 실제로는 찰나의 순간이었겠지만 저는 마치 시간이 오래도록 멈추어 있는 듯 느꼈습니다. 결국 ‘전원 구조’로 바뀌지 않는 뉴스와 정정하려 애쓰는 앵커를 바라보고 있자니 거짓 뉴스를 믿고 안도한 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고 이때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세월호를 잊지 맙시다” 매년 4월 16일이 다가오면 SNS와 미디어에서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부었습니다. 실종자 수색은 어떠한지, 책임자는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진상조사 위원회 등 왜 세월호가 침몰되고 사람들이 차디찬 물속에서 죽어야 했는지 온 세상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듯했습니다. 마치 영원히 파헤칠 것처럼 미디어는 끊임없이 세월호는 끝난 것이 아니다, 끝까지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세월호로부터 6년이 흐른 지금,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는 눈에 띄게 줄었고 큰 충격이라 생각했던 당시의 제 감정도 빛이 바래짐을 느낍니다. 저는 그 이유를 유감스럽게도 세월호 참사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일처럼 느끼면서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스러져간 억울한 이들과 그 가족의 안타까움에 통감하며 세월호 참사의 비밀을 끝까지 파헤치겠다는 다짐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이제는 과거의 시간 속에 갇혀있는 것만 같습니다. 제가 짐작했던 것보다 세월이 주는 ‘익숙함’은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오늘은-’하고 감정 없이 하루 일정을 나열하는 일기와 같습니다. 마치 치매 노인이 치매를 앓기 전의 행동을 단순 반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런 기척 없이 어느 순간 우리의 생활 속에 들어온 ‘익숙함’은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의 눈을 멀게 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하며, 모든 일에 날이 무뎌진 칼처럼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이러한 익숙함에 속아 우리가 세월호 참사에 왜 분노했는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호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될 거고, 이것은 순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세월호에 대해 이젠 그만 말하라고 하는 사람들과 미디어에 설득됨을 느끼면 느낄수록 익숙함이라는 위기로부터 스스로를 구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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