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튜터, 그게 뭔데
제가 다니는 대학에서는 1학년 때 필수로 들어야 하는 교양 과목이 있습니다. 지금은 <글쓰기와 읽기>로 명칭이 바뀐, (구) <기초 글쓰기> 수업입니다. 이 수업을 수강해야 졸업할 수 있지만, 수업만 들었다고 졸업을 시켜주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필수 과제인 '독서 에세이'를 제출해야 하거든요. 제출하지 않으면 F학점이 부여 돼 재수강해야 합니다. 무시무시하죠? 만약 착실하게 과제를 수행해 독서 에세이를 제출했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당신의 글을 처음으로 읽고 첨삭을 작성하는, 글쓰기 튜터거든요.
그럼 제가 쓰는 첨삭의 결과물이 곧 학점이 되냐고요? 그건 아닙니다. 평가의 주체는 교수님이시죠. 저는 1차로 학생의 글을 첨삭할 뿐이고, 2차 첨삭은 교수님께서 해 주십니다. 그러면 튜터는 왜 존재할까요. 단지 교수님의 2차 첨삭을 위한 초석을 깔아 두는 행위일까요. 단호하게 그건 아니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 튜터 제도를 행하는 이유는 배재대학교 교양교육의 뿌리인 '안항' 때문입니다.
가끔가다 하늘에서 V자 편대로 비행하는 기러기를 본 적은 없으신지요. 안항은 바로 그런 기러기의 행렬을 의미합니다. 기러기가 그렇게 나는 이유는 장거리 비행에서 한 마리의 낙오 기러기 없이 목적지까지 함께 도달하기 위함이라고 하죠. 리더 기러기가 바람의 저항을 온몸으로 맞으며 이끌고, 리더가 지치면 옆의 기러기가 교체해 준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낙오 기러기가 발생하는 불상사가 생겨도 몇 마리의 기러기가 함께 낙오해 휴식했다가 무리로 돌아온답니다. 참 신기하죠?
배재대학교에서 그런 리더 격의 역할을 하라고 뽑아 놓은 사람들 중 하나가 글쓰기 튜터 장학생입니다. 어려운 건 앞에서 좀 대신 맞아주고, 옆의 기러기가 힘들어하면 기꺼이 도와주라고 말이죠. 힘들다고 때려치우고 그만하려고 하는 기러기가 있으면 으쌰으쌰 같이 가자고도 해주고요. 이렇게 적어두고 보니 대학의 치어리딩 팀과 역할이 비슷한 듯해 보입니다. 타 대학에도 이런 집단이 있는지, 장학금도 주는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이쯤 되면 글쓰기 튜터가 바람을 맞아주는 게 맞는지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냥 바람이 없는데 응원해 주고, 장학금까지 받으니 거저먹는 꿀 장학생이 아닌가 하고요. 그런 추측은 사실 40% 정도는 맞고, 60% 정도는 틀리다고 할 수 있어요. 그 정도로 꿀이라면 한 학기만 하고 그만두는 글쓰기 튜터는 없을 테니까요. 휴학이나 유학 등의 계획이 있는 글쓰기 튜터는 제외하고 말이죠. 왜 꿀 장학생을 그만두는지 아래의 글쓰기 튜터 생활을 보고 한 번 판단해 주세요.
글쓰기 튜터는 기말고사가 끝날 즈음 선발되어 방학 때 약 2주 간 오프라인 교육을 받습니다. 교육의 주제는 때마다 달라지지만 주제에 따른 책을 읽고, 토론하고, 첨삭 실습을 진행하는 건 똑같습니다. 이때 계절 학기 수업을 듣는 학생의 글을 직접 첨삭해 보기도 합니다. 오프라인 교육이 끝난 뒤에는 방학 동안 배재 권장도서를 읽고 3~4편 정도의 에세이를 써서 제출합니다. 이때 튜터들끼리 서로의 글을 첨삭하며 경험을 쌓습니다.
개강하면 글쓰기 튜터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한 학기에 2회의 조별 첨삭, 1회 개인 첨삭을 맡게 됩니다. 이때 각 회마다 한 분반을 맡아 첨삭을 하게 되는데, 한 분반 당 30명 초반에서 많으면 40명 후반까지 다양합니다. 조별 첨삭 때 운이 좋은 튜터는 10~12개의 글을 첨삭합니다. 그래서 한 명의 튜터가 한 학기에 담당하는 글의 개수는 70개 정도입니다. 개수가 만만치 않죠?
글쓰기 튜터의 진짜 어려움은 개수가 아닙니다. 신입 튜터의 경우 글 하나를 첨삭하는데 2~3시간은 걸리고, 그 이상을 소요할 때도 많습니다. 첨삭에 능숙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워낙 다양한 글을 첨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SNS 글쓰기에 익숙한 탓에 시처럼 문장 하나하나 문단 나눔을 한 글부터 문장 부호 없이 쓴 글까지 형식 자체가 다채롭습니다. 나아가 표현은 독창적인데 글의 흐름이 아쉬운 글, 주제의 깊이가 얕아 학생만의 생각이 잘 드러나지 않는 글 등 학생들의 글쓰기 수준도 천차만별입니다.
여기에서 일정 내에 첨삭을 완료해야 한다는 심장 쫄깃한 조건까지 추가됩니다. 저희가 첨삭을 완료해야 하는 일정은 짧으면 일주일, 길어도 10일 내외입니다. 대충 15명을 일주일 내로 첨삭해야 한다고 치면 하루에 2명 정도만 해도 충분하겠네요. 그러나 신입 튜터라면 보이는 첨삭 일정보다 빨리 첨삭을 끝내야 합니다. 수석 튜터의 피드백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이 때문에 하루라도 첨삭을 안 하게 되면 하루 할당량이 4-5명으로 늘어나는 건 순식간입니다. 5명X2시간=10시간... 미루면 안 되겠죠?
조장을 맡는 수석 튜터도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본인이 담당하는 학생들의 글을 첨삭해야 하는 것은 물론, 신입 튜터, 가끔은 책임 튜터까지 피드백을 줘야 하니까요. 피드백은 학생이 제출한 글을 분석하고, 튜터가 학생 개개인에게 맞게 첨삭을 작성했는지 확인해 피드백을 전달해야 합니다. 이렇게 피드백을 받아 최종 수정을 한 뒤에야 웹게시를 할 수 있습니다. 웹게시는 학생에게 첨삭이 전달되는 직전 단계죠. 이때 글쓰기 교실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재수정 요청이 들어올 수 있어요... 저도 모르게 눈이 촉촉해지네요.
첨삭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나 고됨이 느껴지시나요? 이걸 모두 학기 중에 해내야 한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수업도 듣고, 과제를 해야 하는 건 대학생의 기본이죠. 하지만 요즘 어느 대학생이 수업 듣고 과제만 합니까? 동아리 활동, 교내외 대회, 자격증 공부, 스터디, 인턴십, 근로, 알바... 저는 한 학기만 하고 그만두는 글쓰기 튜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런 제 마음은 글쓰기 교실 교수님께 비밀로 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미디어콘텐츠학과 20학번 김민서입니다. 이번이 N번째 글쓰기 튜터 활동이에요."
글쓰기 튜터가 되면 교육 첫 시간에 어김없이 자기소개를 해야 합니다. 그때마다 위에 쓰인 저 문장으로 수없이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매 학기 글쓰기 튜터 장학생을 뽑으니 횟수로는 6회겠네요. 네, 제가 앞에서 바람맞아주는 글쓰기 튜터 활동을 대학 생활 4년 중에서 3년이나 한 사람이랍니다. 아무것도 몰라 허둥지둥 댔던 신입, '나도 모르는데 누굴 책임져?' 했던 책임 튜터를 지나 고인물 소리 듣는 수석 튜터가 되어 '영원한 튜터'로 졸업했습니다. 졸업한 후에는 수호천사라는 우스갯소리도 들었네요.
이렇게 글쓰기 튜터를 계속 한 이유는 앞서 40% 정도는 맞다고 했던 '꿀'에 있습니다. 단순하게 응원하고 장학금 받아서 꿀이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닙니다. 제가 글쓰기 튜터가 꿀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글쓰기 튜터 활동 하나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꾸준하게 글을 읽고 쓰다 보니 독해 및 작문 능력이 향상했습니다. 대학에서 가장 자신 있는 과제는 단연 '자신의 생각을 담은 리포트 쓰기'였습니다. 브런치 작가 심사도 단번에 통과했으니 효과가 확실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나아가 인격적 측면에서도 성숙해졌음을 느낍니다. 인간관계가 무척이나 좁았던 제가 처음 만난 타인에게도 기꺼이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게 됐거든요. 곁에 있는 이가 힘들어할 때 기꺼이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게 된 변화도 있었습니다. 또한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는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잘 되길 바라고 마음을 다해 응원할 수 있게 된 것도 글쓰기 튜터 활동을 한 이후부터입니다. 그렇게 된 건 아마 심적으로 많이 안정되어 타인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추측합니다. 이 정도의 성과면 글쓰기 튜터가 저에게 꿀이었다고 할만하죠? 이러한 성장은 글쓰기 튜터를 하며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브런치에서 나누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가 학생의 글을 첨삭할 때 메모해 두고 계속 읽는 목표가 있습니다. "글쓰기가 어려운 학생은 글쓰기에 재미를 느끼는 계기가 되도록, 글을 잘 쓰는 학생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 풀어낼 수 있도록 첨삭하자."입니다. 이번에 연재할 제 브런치 글도 방향성은 비슷합니다. 글이 어려운 분에게는 글이 재밌게 느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글을 쓸 용기가 없는 분에게는 조그마한 용기를 심어줄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글을 통해 스스로 성장한 방법, 글과 친해진 방법 등 제가 글로 단단해진 경험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그렇게 단단하게, 함께 살아보자고 말 한마디 건네는 중인 겁니다.
저와 이 길고 긴 여정을 함께 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