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한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 전 스친 문장이 희선의 머릿속을 내내 떠다녔다.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서였다. 동네북이 된 것 같은 느낌. 그 기분을 가장 생생히 실감시키는 곳은 아르바이트였다. 구체적으로는 카페 아르바이트. 희선이 근무하는 카페는 약국을 운영하느라 바쁜 사장님이 경영 전부를 매니저에게 일임하였는데, 그 무관심의 정도가 얼마나 컸으면 매니저가 자신의 역할과 본분을 잊을 정도였다. 면접 날, 매니저가 희선에게 말했다.
"사장은 카페에 거의 안 와. 요즘은 개나 소나 카페를 한다고 설치는지."
그때 희선은 이 카페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는지 매니저를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사장님께도 함부러 말하는 매니저가 아르바이트생은 얼마나 우습게 여길지는 뻔했다. 매니저는 희선에게 불시에 톡을 보냈다. 레시피를 외웠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희선은 10초 안에 대답해야 했다. 끝이 아니었다. 더 큰 산은 또 다른 아르바이트생 재빈이었다. 재빈은 지적할 무언가를 찾아 헤메는 사람처럼 온 신경을 희선에게 곤두세웠다. 음료를 제조할 때면 물부터 넣는지, 시럽부터 넣는지, 샷부터 넣는지 사사건건 엄격하게 간섭했다. 우유 스팀을 할때면 각도를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언성을 높여 지적했다. 정작 자신의 순서는 제각각이면서. 그럴때면 희선은 그저 네, 하고 말았다. 그때까지만해도 희선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뭐랄까, 심술 같은 것이 너무 훤히 보여서 아프기보단 오히려 안쓰러워 보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희선을 고통받게 하고 나아가 인간에 대한 회의감으로까지 번진 것은 그 톡 이후였다.
-‘이거 아이스티 누가 만들어 놓고 갔어!’
매니저, 희선, 재빈이 포함된 톡방이 울렸다. 매니저의 톡에서는 그녀의 분노가 절절히 느껴졌다. 아이스티라면 하루 전 희선이 대량으로 제조해 놓고 간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재빈의 감독 하에 희선이 만들었다. 저울 위에 대용량 통을 올려두고 그램 수까지 정확하게 재서. 물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도 재빈의 지시였다. 희선이 대답했다. 제가 만들었어요. 동시에 톡 옆에 있던 숫자 '3'이 사라졌다. 재빈도 실시간으로 그 톡방을 보고 있던 거였다.
-이렇게 달게 만들면 어떡하라는 거야? 손님이 컴플레인하면 니가 달려와서 사과할거야?
-레시피에 있는 대로 저울로 재서 만들었는데, 어떤게 문제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레시피 있다고 그대로 만들면 어떡해? 적당히 조율해서 사람 입맛에 맞게 해야지!
하, 희선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만약 희선의 대답이 레시피 대로 만들지 않아 죄송하다였다면? 희선은 매니저의 답변을 예상할 수 있었다. 레시피 대로 만들면 안되는 음료가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미리 알려주는 것이 매니저의 역할이 아닐까? 그러나 희선은 위의 말을 모두 삼키고 딱 한 마디 답장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희선의 사과에도 매니저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무언가를 자꾸 보냈다. 희선의 무능력을 탓하는 말이었다. 희선은 생각했다. 그럴 시간에 레시피 대로 만들면 안되는 음료를 알려주겠다고. 고작 아이스티였다. 저렇게까지 분노하기엔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 혼나는 사람 마저 의아하게 만들 만큼 아무 것도 아닌, 고작 아이스티였다. 그럼 당신이 물을 더 부으면 바로 해결되지 않나요? 반문한다면 원망의 시간은 두 배 더 길어질 것이다. 희선은 다시 죄송합니다, 라고 답장했다. 그러는 동안 재빈은 한 마디도 거드는 게 없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을 한발짝 떨어져서 관망하는 사람처럼, '1'이 사라지는 그 모든 순간에 침묵을 유지했다. 타인에는 그 누구보다 엄격하고 신랄하리만큼 가차 없었으면서, 어쩌면 자신의 지분도 분명히 존재하는 이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나섬이 없었다.
그래도 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한다.
불현듯 이 문장이 희선의 머리속을 스쳤다. 매니저에게 짓밟히는 그녀의 자아를, 그 과정 전부를 외면하는 비겁한 타인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면서.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희선이 취업준비생에서 '그냥 쉰 청년'으로 옮겨간 시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