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기숙사로 돌아가는 윤정의 발걸음이 오랜만에 경쾌했다. 기숙사에는 예진이 혼자 있었다. 윤정은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2층 침대로 올라갔다. 기숙사는 현관을 중심으로 오른편에는 윤정과 예진이 쓰는 2층 침대가, 왼편에는 희선의 단독 침대가 있는 구조다. 2층 침대의 2층 자리를 택한 것은 윤정의 자의는 아니었다. 윤정이 기숙사에 도착했을 땐 이미 1층 침대 두 개에 주인이 있었다. 윤정의 룸메이트이자 동갑내기 두 언니 예진과 희선. 선택권이 없어진 윤정이 자연스레 2층 침대를 쓰게 되었는데 윤정의 후기는 대만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내려야하는 경미한 불편함보다 2층이라는 공간이 주는 사생활 보호가 압도적 컸기 때문이다. 혼자 왼편 공간을 쓰는 희선은 미안했는지 다음 달에 자리를 바꿔 주겠다고 했다.
"내가 두 달 쓰고 네가 두 달, 이렇게 반반씩 쓰면 딱 한 학기 지나갈 것 같은데, 어때?"
윤정은 괜찮다고 했다. 정말 괜찮아서였다. 그러나 그냥 괜찮다고 한다면 더 미안해할 희선의 성격을 알았기에, 2층 침대가 주는 장점을 설명하고 추가로 짐을 옮기는 것도 귀찮아서 그대로 2층을 쓰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래, 혹시라도 1층 쓰고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희선이 말했다. 윤정은 희선의 배려로부터 사수한 2층 침대에 누워 세희의 프로필 사진을 구경했다. 새로운 친구에 등장한 '세희'의 프로필 사진을 보자 왜인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어서완 때문에 얼마나 화나던지.”
윤정의 손가락을 멈추게 한 것은 1층 침대에서 올라오는 예진의 목소리였다. 예진의 입이 뾰류퉁 나와있었다. 오늘도 이유는 ‘서완’ 때문이다. 예진과 홍보팀에서 근로를 같이 하는 경영학과 학생. 방과 후 서완에 대해 듣는 것은 익숙한 루틴이지만 요즘엔 조금 놀라울 정도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인간에게 매일 기분 나쁨을 선사할 수가 있나. 다만 윤정은 예진이 서완을 언급할 때면 웃음이 났는데, 그의 성씨가 ‘어’ 씨 였기 때문이었다. 어서완. 일부러 그렇게 작명했는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오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을 명명하기 위해 어서오라는 말을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예진의 상황이 애처로우면서도 동시에 웃음을 유발했다.
“오늘은 왜?”
“자기가 무슨 미술 박사라는 거야. 자기 입으로.”
예진은 윤정에게 서완과 있었던 일을 쏟아냈다. 예진의 이야기는 이랬다. 예진이 어렵게 예약한 전시회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는데 서완이 아쉽게 됐네, 라고 말했다고. 뭐가 아쉽냐는 예진의 물음에 서완이 대답했다. 내가 해설해주면 너한테 도움될 텐데 그날은 수업이 있어서.
“아니, 자기가 뭔데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같이 못가줘서 아쉽다니 뭐라니 하는 거야.”
"미술은 또 어떻게 박사인거야? 저번에는 법도 잘 안다며?"
"몰라!"
예진이 몸을 뒤척이는지 침대가 조금 흔들렸다. 윤정은 실소를 터뜨렸다. 세상에. 어서완. 그는 누구일까. 이쯤되니 일부러 찾아보고라도 싶었다. 예진에게 들은 바로는 경영학과 내에서도 학점 괴물에,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며, 예술 계통도 두루 섭렵하고 있고, 법은 전문가 수준으로 꿰고 있는 사람이었다. 검증되진 않았지만 본인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한 말이라고.
"너 아직 학교에 친구 없지?"
1층 침대의 뒤척임이 끝나갈 때쯤 예진이 물었다. 무던히 실소를 이어가던 윤정의 상기된 얼굴 근육이 금세 가라앉았다. 친구 없냐. 걱정이나 도움을 주려는 것이 아닌, 당연한 걸 확인한다는 듯한 말투로 묻기엔 조금 조심스런 질문이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그 문장에 깃들어 있는 예진의 악의 없음 역시 너무나 명백해서 윤정은 마음이 서늘해졌다. 이런 식의 말투라면 예진은 종종 윤정을 놀라게 했고 따끔거리게도 했지만 언제나 예고 없이 던져졌던 법이여서, 윤정은 매번 어떻게 답하면 좋을지를 몰랐다. 지금처럼.
"왜?"
"네가 걔를 빨리 알았으면 해서."
"아,"
"짜증나."
윤정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희선의 빈 침대를 내려봤다. 아마도 희선이라면, 애초에 누군가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느라 시간을 쓰지도 않았을 테지만, 타인에게 불편함을 줄 여지가 있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었다. 예진과 희선은 결이 달랐다. 예진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이었고, 희선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예진은 보이길 갈망하는 사람이었고 희선은 보이길 꺼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윤정은 예진이라면 그녀의 천적인 서완까지도 알고 있지만, 희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고시촌에서 3년을 보냈다는 것, 합격하지 못했다는 것, 기숙사에 살기 위해 졸업을 미루고 수료 상태로 있다는 것, 취업 준비를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 동시에 주 5일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 주말에는 본가에 내려간다는 것, 무엇보다 착하다는 것. 같이 사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알게 되는 정도의 정보가 다였다. 그냥 눈에 보이니까 아는 것들. 하루 일과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예진과 달리 희선은 주로 듣는 편이었다. 희선이 그걸 원하고 있음이 보일 때도 있었다. 예진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지친 얼굴로 애써 웃음 지을 때는 더욱 그랬다.
아, 딱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속 이야기는 도통 하지 않는 희선에게서 유일하게 흘러나온 내면의 것은 시대에 대한 고찰이었다. . 야식을 먹자고 제안한 사람은 희선이었고, 치킨이 어떠냐고 제시한 사람은 예진이었다. 그렇게 세 룸메이트는 치킨 두 마리를 중심으로 둘러 앉아 조촐한 첫 회식을 치렀다. 그날, 희선은 윤정과 예진에게 시대에 대해 물었다. 시대상이라니. 첫 회식의 대화 주제 치고는 무거웠지만, 무언가 희선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합류가 허용되지 않는 시대. 후진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 공백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은 윤정이었다. 지금은 합류가 허용되지 않는 시대라고. 그날은, 개강총회에서 상처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자격지심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때였다.
"똑같은 한국대 학적을 갖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중간에 합류했는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거든요."
윤정의 말에 예진이 반박했다. 어쨌든 입학 전형이 다르고 입시 과정 다른데, 같은 선상에 있으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그러니 더 나은 결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고. 희선이 다시 반박했다. 결과로 해결될 문제라면, 처음부터 다르게 평가하면 안 되었던 거라고. 설령 더 나은 결과를 보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예진은 삼수 끝에 한국대에 입학했고, 희선은 재수 없이 현역으로 입학한 터라 셋의 의견이 조금씩 엇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평가가 같으면 나도 3년을 허비하지 않았을 거야."
예진의 말은 후진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라는 고찰로 이어졌다. 희선은 공백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라고 했다. 시대의 흠결을 판단하는 근거는 각자가 가진 결핍에서 비롯되어 있었다.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아니, 진리까진 닿지 않더라도 누구의 말이 가장 설득력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예진이 말했다. 숫자가 많은 쪽의 신빙성이 높겠지.
“숫자는 큰 의미가 없어.”
희선이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공감이 우선이었던 희선의 평소 화법과는 달랐다. 윤정은 귀를 쫑긋했다. 희선의 말이라면 윤정은 진심으로 존중하며 귀담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듣고 싶었다. 착한 사람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그건 정말 단순한 심술이 아니라 확고한 신념일 테니까.
“그러면 대의민주주의는 언제나 성공해야지. 소선거구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단순다수제는 숫자를 더 많이 확보한 사람이 승리하는 제도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는 대표자를 뽑아서 순탄하고 평화로웠던 적이 있었어?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항상 도래했지."
조촐한 치킨 회식은 토론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예진이 입을 뾰루퉁 내밀고 무어라 반박했다. 조금씩 아슬아슬해지는 분위기. 마무리는 희선의 양보로 끝났다. 그렇구나, 네 말이 맞네, 그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겠구나. 불이 꺼진 후, 윤정은 2층 침대가 조금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건 기분탓일까.
그리고 다음 날, 윤정은 희선이 말한 '공백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가 무슨 의미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방 안에서 전화를 받는 희선은 아마도 방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원래는 윤정이 없는 시간이었으니까. 휴강으로 학교에 가지 않은 윤정이 2층에 누워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번에 면접본 회사 결과 나왔다고 해서 확인해 보려고.”
떨어졌네, 희선이 담담하게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위로의 말이 건네졌는지, 희선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나도 잊고 있었어.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고, 일부러."
만약 아무런 성과가 없다면 그 후에 오는 허탈감과 실망감에서 벗어나는 것도 꽤 큰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일이란 걸 알기에 나름대로는 방어기제라고 희선이 설명했다. 오히려 잊고 지내다가 불현듯 성과 없음을 확인했을 때, 그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세뇌를 하고 있었던 건지 큰 타격이 없었다고 덧붙이면서.
윤정은 희선이 어떻게 취업 준비를 하는지 매일 매일 봐왔기에 그녀가 고시촌에 있었다는 3년 역시 얼마나 성실했는지 그리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무언가에 기대하지 않는 걸 체득한 시간이라니, 너무 가혹하잖아. 어쩌다보니 희선의 전화를 엿듣게된 윤정은, 전화를 끊은 후에야 소리내고 우는 희선을 온 힘을 다해 모른 척 했다. 인기척을 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움직이지 않는 것도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희선이 나가고서야 윤정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윤정이 할 수 있는 배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