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형!"
동우가 벌떡 일어나 재한을 맞았다. 입대 날 훈련소 앞에서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반년 만의 재회였다. 입대 하루 전날 동우의 미용실에 따라온 것이 훈련소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하게 동우만 몰랐다. 재한은 알았고. 꼭 가족만 아쉬워하고 걱정해야 하는 법은 없잖아? 재한이 그렇게 말했을 때, 동우는 그렇긴 하네, 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 마음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동우는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한 번도 재한에게 털어 놓은 적이 없었다. 굳이 숨길 것 까진 없었지만, 또 굳이 자처할 것도 없었으니까. 어느 지점에서 재한에게 힌트를 줬는지도 모른다. 재한 역시 동우의 가정사를 대충 짐작하고 있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어쩔 땐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면 일부러 피하는 노력까지 보였다. 동우는 그저 재한과 같은 방식으로 그의 배려를 고맙게 받았다. 혹여나 동정으로 비춰질까 조심하고 있는 재한 동우가 눈치챘지만 모른 척 했듯이.
“많이 기다렸어?”
“저도 방금왔어요. 형은 수업이 일찍 끝난 거예요?”
재한은 대답 대신 동우의 등을 토닥였다. 수업 일찍 끝났냐는 평밤한 대학교의 언어가 동우는 낯설게 느껴졌다.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 한 발짝 물러났다고 이렇게나 배제된 기분을 주다니. 고작 한 학기만에 완전히 상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전역 후에는 얼마나 멀어져있을까. 아득한 것은 전역까지의 시간이었는데, 이곳에 오니 그 아득한 시간 후의 시간까지도 두렵게 만들었다.
“학교까지 왔는데 다른 애들은 안 만나?”
“저는 뭐, 후문에 사니까 특별할 것도 없어요. 다들 고학년이기도 하고, 바쁘니까.”
“그중에서 나는 예외다?”
재한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 셈이죠, 동우도 장난기를 머금고 대답했다. 그런데 정말 재한은 예외였다. 바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예외는 아니고, 어색하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예외였다. 한국대에서 보낸 시간만 2년. 그러나 군대에서 보낸 시간 6개월은 2년의 시간을 삼키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중에서 재한만은 예외였다. 아무리 오랜만이라도 형, 하고 전화하면 언제나 반갑게 받아주던 존재였다.
요즘 동우는 잠들기 전이면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 개학 첫 날의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다. 한 달 남짓한 방학을 보내고 학교에 돌아오면 친했던 친구와도 인사를 나누는게 어렵게 느껴졌다. 방학 전 쌓은 친밀감이 다 날라간 느낌. 그런 종류의 휘발성이라면 대학은 더욱 강력했다. 술자리에서는 영원의 단짝이라도 된 것 처럼 굴다가도 다음 날이면 괜히 고개를 피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와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지만 지속성은 길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그려러니 해도 세희의 경우는 동우의 마음을 아리게 했고.
“복학해도 적응 못 할 것 같아요. 모르는 얼굴 투성인 거 있죠.”
“나도 그래.”
“형은 재학생이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해요.”
“사실은,”
그렇게 말을 끊은 재한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동우는 고개를 돌려 재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 휴학했거든."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추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동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형, 학교에서 온 거 아니었어요?"
"집에서 왔어. 지금은 휴학하고 알바하고 있고.”
한국대 후문 호프집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주문한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 뚜껑부터 열었따.
"이제는 부모님이 원하는 길이라고 생각되면 오히려 반발심이 들어서 하기 싫어져. 불씨 같은 게 피어오르려다가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사그라지지. 그땐 오히려 탄내만 남는 거야."
동우는 재한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주며 물었다.
"형이 하고 싶은 건 있어요?"
"모르겠어. 그게 문제고."
재한이 소주를 삼켰다. 쓴맛 때문인지 재한의 얼굴이 곧바로 구겨졌다. 구겨지며 생기는 주름 사이사이에서 시름 같은 것이 깃들어 있는 것도 같았다. 부모님에 관한 부분이라면 동우는 재한의 말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동우의 경우라면, 엄마는 동우에게 선택과 책임을 일임했지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는 법이 없었으니까. 가끔은 어른의 지도나 조언이 고프기도 했지만 엄마는 단호하리만큼 동우의 선택 과정에 침범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우리 밖에 없다. 엄마는 그 가훈 아래 동우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독립심, 자립심, 책임감 같은 것들을.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엄마는 어쩌면 그녀가 일찍 떠나고 혼자 남을 동우의 모습을 일찍이 예상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부분에서는 동우도 재한과 완전히 같은 마음이었다. 모르겠다. 그게 문제고. 그리고 이 문제는 두 사람 사이 갑작스레 부상한 화두는 아니다. 두 사람의 인연 초기부터 존재했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문제지.
1학년 1학기 수업 '인생과 진로 설계' 과목에서 팀 활동을 같이 한 것이 동우와 재한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한국대 신입생이라면 반드시 수강해야하는 필수교양이었는데, 그 이유가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청년 진로 탐구 특화 사업 시범 대학으로 선정됐다나 뭐라나. 과목 이름만 봤을 땐 이름만 거창한 따분한 교양수업이겠거니 하고 만만하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오산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업 내용은 좋은 말로 독특했고, 솔직하게는 유별났고, 전공수업보다 더 많은 과제를 요구했다.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해결되는 과제였다면, 그 과목은 그렇게 많은 신입생들에게 원성을 사진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학교 중앙광장 한 복판에서 꿈에 대해 연설하는 영상을 찍어 오는 것, 처음보는 행인을 붙잡고 10년 후 내 모습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수치심을 곁들인 과제가 대부분이었다.
곧 중앙광장에는 인생과 진로 설계 수강생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한 명이 연설을 하면 다른 한 명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광장 여기저기서 수 백명이 2인 1조로 과제를 하는 기묘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안쓰럽다고 혀를 찼지, 과제의 의도대로 연설을 진중하게 듣거나, 감탄하거나, 자극을 받거나 하는 학생은 어디에도 없었다.
개강 한달 쯤 지났을까, 새로운 과제는 지금까지의 수업에서 발견한 내 적성과 흥미를 토대로 내가 꿈꾸는 직업인을 만나 명함을 구해오라는 것이었다.
"아니, 뭐가 되고 싶은지 한달 만에 결정해서 명함까지 받아오라는 게 말이 되요?"
팀원들의 볼멘소리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진심어린 문제의식이었다. 동우는 그때 어른들의 무책임한 성과주의와 전시주의의 심연 같은 것을 보는 것 같았다. 고작 한 달이었다. 꿈 꿔야 하는 사람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시간. 어딘가에 보고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만 고려한 시간. 그 과제를 기점으로 동우와 재한은 빠르게 단념했다. 오직 F를 면하기 위한, 내용은 고민하지 않고 그저 빠른 제출을 위한 방법만을 고민했다. 그러기 시작하니 오히려 톡방에는 불평이 사라졌다. 좋은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우와 재한은 신문사 앞으로 향했다. 기자의 명함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명함을 달라고 부탁했을 때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곧바로 줄 것 같은 직업이 기자였고, 예상대로 기자는 흔쾌히 명함을 건넸다. 그 기자가 정말로 제보를 기다렸을지는,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취재원 중 한 명이라 가볍게 생각했을지는 모른다. 어쨋거나 둘의 전략은 좋았고 아주 수월하게 과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어쩌다보니 '형식적으로' 기자를 꿈꾸게 된 두 사람은 그 후로도 여러 과제를 함께 치러나갔는데, 나중에는 장래희망 기자 맞춤형으로 부여오는 과제들이 웃길 뿐이었다. 그 역시 좋은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동우와 재한이 진로 문제를 가벼이 여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재한은 너무 무겁게 여겨 고통받는 쪽에 가까웠다. 거기에는 수능을 4번이나 본데서 오는 조급함, 부담감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나이에 관해서라면, 오히려 나이를 먹을 수록 부담감은 옅어졌다. 스무 살때만 해도 1년 차이가 너무 커보여서 재수는 꿈도 꾸지 않았다. 스무 살의 재한은 교대에 진학했다. 막상 대학에 오니 재수생이 절반에 가까웠고, 삼수생도 너무 많았고, 드문드문 사수생도 있었다. 그리고 매년 수능을 다시 치뤄 3년 후 한국대로 옮겼다. 다시 1학년이 된 것이다. 물론 늦지 않게 착, 착 이뤄내면 좋겠지만, 조금 느린 사람도 세상에 많다는 걸 매 해 확인했고 방향을 중시하는 재한에게는 그 자체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대에 와서 길을, 방향을, 속도를, 심지어 현재 위치까지도 완벽하게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포털 사이트에 직업 추천이라고 검색해 본 적이 있다. 재한의 간절함이 무색하게 화면 위로는 메이플 스토리 직업 추천이 가득 떴다. 재한은 헛웃음으로 창을 닫았다. 가끔은 나만 이렇게 심각한 건가 의심이 들었다. 나만 유난을 떠는 건가 하고. 민혁은 로스쿨에 간다고 했었지. 태영은 행정고시를, 상우는 회계사 시험을 본다고 했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한에게 민혁이 말했다. 형, 정 모르겠으면 그냥 로스쿨 가. 그날 밤, 재한은 민수의 말을 곱씹느라 밤을 지새웠다. 로스쿨이 잘 모르겠을 때 가는 곳이 맞나. 그 일을 하고 싶은가. 그 전에, 법조인이 되었을 때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감당할 자신이 있나. 적성을 따지기 이전에 능력부터 미달일 것 같은데. 그렇게 재한은 엄격하게 자기 검증에 나섰다.
“너는 전역하면 계획이 어떻게 돼?”
재한의 물음에 동우가 눈을 끔뻑거렸다.
"형, 그날이 존재하긴 해요?"
우문현답이다. 동우의 대답을 듣고서야 재한은 동우가 입대한지 육개월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지했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그 후를 기대하고 있다니. 이럴 때는 정말로 자신이 유난인 쪽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계획형 인간인데다가 생각도 많은 어찌보면 참 피곤한 인간.
“전역 후까지 생각하기엔 너무 아득하고, 우선 현재에 최선을 다하려고요. 지금도 실수가 너무 많거든요.”
그치, 그래야지. 재한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우는 안주를 하나 집어 먹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형이 교대에 계속 다녔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