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명절이 싫어. 몸은 편한데 마음이 괴로워."
동우는 들고 있던 커피컵을 세희의 컵에 살짝 부딪혔다. 나도 그래, 덧붙이는 동우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드리웠다.
"그냥 빨간날, 공휴일. 딱 그만큼만 생각하려고 애써도 이미 관습화된 정서란 게 있잖아. 명절은 가족과 함께 하는 날이라는. 그 상징이 품고 있는 연대가 너무 단단하니까, 거기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도 마음이 시큰 법이지."
동우의 말에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통하는 기분. 이걸 반가워해야 하나, 여기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결론짓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세희는 동우와의 대화를 편안해하고 있었다. 슬픔이나 원망의 단계를 뛰어넘고 시작한 대화가 주는 편안함이었다. 그건 그걸 뛰어넘었다고 스스로 인지하는 사람만이 알아 챌 수 있는 것이었다. 고통의 형체를 묘사하지 않아도 되는 대화. 그저 지나간 어떤 과거를 복기하듯 천천히 읊조리는 대화.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대화. 동정도 연민도 필요하지 않고 그냥 그렇다고, 하고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대화. 그걸 나누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든든해지는 대화.
“너는 안 미워? 아빠.”
세희가 물었다. 아빠가 밉지 않냐니. 다른 사람에게는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일 테다. 그럼에도 아무런 동요도 없이 묻고 또 받아들이는 상황이 왜인지 머쓱해 세희와 동우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동우는 입가에 남아 있던 웃음기를 지우고 천천히 대답했다.
“밉다기 보단, 이젠 좀 안쓰러워.”
“어떻게 그래?”
“엄마 돌아가시고 슬픔보다 돈이 먼저 떠올랐다는 거잖아. 얼마나 빈곤한 삶이면 그럴까 연민도 들고.”
"음, 돈."
돈. 그 단어가 세희의 입에서 잠깐 머물렀다. 어떻게 대답해야 무리가 없을지 고민하고 있단 걸 동우는 눈치껏 알 수 있었다. 세희라면 아마도 돈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직면해본 경험이 없을 것이다. 세희가 허세를 부리거나 오만한 태도를 보인 적은 한 차례도 없었지만, 그냥 느껴지는 것이었다. 돈이 없으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어느 구멍으로든 허점이 새어 나갔고, 마찬가지로 돈이 있으면 티를 안 내려고 해도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티라는 것은 그 자체로 발광체인데 빛은 아무리 숨겨도 새어가는 법이니까. 세희의 경우는 후자였다.
“그래도 너가 있으니 위안이 된다.”
결국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세희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어라 대답을 하면 좋을지 헤매는 사람은 이번엔 동우였다. 동우가 머리속으로 되뇌었다. 자신의 쓸모에, 세희의 미소에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고. 세희라면 대화 상대방이 누구든 저 말을 했을 거라고. 그러나 이미 늪에 빠져버린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분명히 있었다. 아무리 타일러도 수그러들지 않는 마음. 그건 본능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길 잃은 대화를 중단시킨 것은 세희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잠깐만."
기다리던 전화였을까. 세희는 전화번호를 확인하더니 카페 밖으로 뛰어 나갔다. 동우는 카페 통유리창 너머로 세희를 살폈다. 방금 전의 세희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들뜬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눈썹을 찡그리고, 입을 삐죽 내밀고, 이마를 짚고, 머리를 쓸어내릴 뿐. 그리 길지 않은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세희는 낮은 탄식과 함께 말을 이었다.
“남자 친구.”
아, 동우는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을 저며 오는 느낌을 애써 외면하면서. 남자 친구라면 승범을 말하는 것이다.
"근데 승범이 형이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세희가 고개를 살짝 들고 동우를 바라봤다. 뜻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뒤늦게 미소의 의미를 알아 챈 동우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 들었어."
“하여간 CC는 이래서 피곤하다니까."
세희가 장난기를 머금은 미소로 대답했다. 분명 웃는 얼굴이었지만, 동우는 괜히 실언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미안."
"네가 미안할 건 아니고. 동아리 회식에서 처음 만났어.”
아, 동아리 회식. 동우가 낮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그다음도 궁금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랬다. 동아리 회식에서 만나서 어떻게 연인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회식날이 승범의 군입대 전인지 후인지 그런, 뭐랄까 동우에게도 여지를 남기는 궁금증에 대해. 다만 지금 듣겠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본인이 초라해질까봐 보다는 세희가 곤란해질까봐에 가까웠다. 지금도 그랬다. 공휴일 저녁에 세희와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있다니. 이런 자리는 승범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동우라면 세희가 긋지 않는 선까지도 어림잡아 계산해 먼저 물러나주는 쪽이었다.
“명절엔 군대도 쉬는 줄 알았는데 연락 한 번 하기 힘드네.”
"네가 전화 걸면 되잖아. 휴대폰 쓸 거 아냐."
"그냥, 뭐. 바쁠까봐."
세희가 말끝을 흐렸다. 그때 동우의 감정은 질투까지도 닿지 못했다. 그저 일차원적인 부러움이었다. 경쟁이라도 되어야 질투를 하는 법이다. 승범의 전화를 기점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각자 집으로 흩어지면서, 두 사람은 추석 잘 보내라는 말 대신 잘 쉬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날 이후 동우는 학교에서 세희를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차고에서도, 복도에서도, 학식에서도. 일부러 피하려고 해도 이렇게 하긴 힘들겠다 싶을 정도로 세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동우는 기말고사를 치르자마자 입대를 해야 했다. 세희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실수한 게 있을까. 눈치 없는 행동을 한걸까. 혼란스런 마음으로 잠들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동우는 다시 신발코로 바닥을 툭, 툭 찼다.
"동우!"
세희에 대한 회상이 끝나갈 때 쯤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저만치서 걸어오는 재한이 보였다. 동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시간 보다 삼십 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