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동우는 경영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건물인 공학관 앞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재한과의 약속 시간까지는 1시간이 남아 있었다. 사실 재한은 핑계였다. 세희 때문이었다. 오직 세희 때문이었다. 동우가 휴가 첫 날부터 굳이 한국대에 와서, 또 굳이 경영관을 기웃거린 이유는. 그곳에 가면 세희와 우연히 마주칠 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부대를 나섰다. 그런데 너무 빨리 만나버린 것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는지까진 몰랐다. 못났다, 하고 자기 자신을 구박하는 것 외에는.
동우가 신발코로 바닥을 툭툭 찼다. 그러다 불현듯 사랑에 빠지는 것은 너무 어렵고 동시에 너무 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너무 쉽고 너무 어렵다라. 양립할 수 없는 문장이란 걸 알면서도 세희를 대입하면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지는데는 무수히 많은 우연들, 예컨대 이상형, 외로움, 시간적, 경제적 여유 등 무수한 제반 사정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교집합을 이뤄줘야 할 것 같다가도, 어쩔 때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어떠한 인과 관계로도 합리성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를 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저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인데 한 발짝 앞 나뭇잎이 덮혀 있던 늪에 푹 빠져버리는 것이다. 고작 미끄러지는 찰나면 충분히 무너질 사랑에 대한 관념들을 왜그리 오랜시간 천천히 그리고 어렵게 정립해온 건지 해무해하면서.
“학생 한 명이 나한테 이모, 하고 부르면서 식권을 주는 거 있지. 그 단어 하나에 온종일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녹는 거야. 어찌나 예쁘던지.”
동우는 고등학교 3학년 어느 저녁 날을 회상했다. 아슬아슬한 기류가 감돌던 모자(母子)의 저녁 식탁 위로 오랜만에 웃음이 번진 날이었다. 무뚝뚝한 고3 아들과 새로운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엄마의 대화는 삶지 않은 소면처럼 뚝, 뚝 끊겼고 그것은 아들과 엄마의 기운을 조금씩 앗아가고 있었다. 아들은 엄마를 위로할 줄 몰랐고 엄마는 아들까지 살피기엔 인간이란 존재에 지쳐있었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텃세였다. 대학교 학생식당으로 일터를 옮긴 엄마는 나날이 수척해졌다. 일이 아니라 사람때문이었다. 엄마가 말했다. 눈에 불을 켜고 헐뜯을 거리를 찾아 헤메는 것 같다고, 어쩔 땐 실수하길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고. 그런데 엄마가 웃는다. 누군가의 친화력이 엄마를 웃게 한다. 엄마를 걱정하고 있던, 그러나 위로의 방식을 헤맸던 동우에게도 고마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가 떠났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교통사고였다. 우리에겐 우리 밖에 없어, 어려서부터 그렇게 동우를 타일렀던 엄마가 '우리'에서 먼저 이탈했다. 어떻게 나만 두고 갈 수 있어, 동우는 울부짖었다. 그해 겨울, 동우는 한국대 경영학과 합격증을 받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교의 학생이 된 것인데 동우에게는 그에 걸맞는 기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입학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스무살, 대학생, 새내기. 이런 단어들은 동우의 신분을 설명하는 것들이었지만 동우는 그들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생기나 활기 같은 것들까지 가지지는 못했다. 동우를 두고 떠도는 소문, 쌀쌀 맞다거나 무뚝뚝하다거나 하는 말들은 사실 동우 스스로가 자처한 것이기도 했다. 동우도 알았지만 상관 없었다. 당연히 억울할 것도 없었고. 그날 학생식당에서 세희를 보기 전까지는.
“이모, 오이는 빼주세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저멀리 식권을 건네는 세희가 보였다. 그다음은 너무 뻔했다. 늪에 빠져버린 것이다. 뻔하지 않은 것은 그 마음이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다는 거였고. 당장 뭘 어떻게 해보겠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동우는 세희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히려 동우는 언제나 정확하게 물러나고 비켜주는 쪽이었다. 다만 실연당한 세희가 힘들어할 때, 용기를 내지 않은 걸 후회한 것은 맞다. 동우를 머뭇거리게 한 것은 곧 있을 입대였다. 망할 타이밍. 한참 후 세희에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고 그 남자친구가 군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원망했어야 하는 건 타이밍이 아니라 용기였음을 깨달았다. 그땐 열차가 이미 떠난 뒤였고.
동우는 군생활이 버거울 때마다 입대 직전의 추석을 떠올렸다. 그 추석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세희 때문이다. 이것도 뻔하다면 뻔하겠지. 학생들이 떠난 한국대 후문 자취촌에는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동우는 그 고요 한가운데서 방황하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본가’라고 할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후문 원룸이 동우에겐 자취방이자 본가였다. 장례가 끝난 후, 아버지가 동우에게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집을 팔자'였다. 집이라면 동우와 엄마가 살고 있는 엄마 명의의 아파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서류상으로만 부부였으면서 저렇게 쉽게 집 이야기를 하는 게 미안하지도 않을까. 동우는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인간의 뻔뻔함에 감탄이 나왔다. 아버지가 말했다. 본인 몫의 상속분을 현금화해서 사업 자금으로 써야된다고. 동우는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 아버지에 관해서라면 지분으로도 얽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파트 매매를 전담한 아버지는 법정상속비율 만큼의 금액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동우에게 이체했다. 뻔뻔스런 모습을 보일 때와는 달리 더 욕심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혼자 세상에 남겨진 아들에게 일말의 연민도 보이지 않고, 법에서 정한 만큼을 정확하게 나누었다. 다만 '돈 보냈으니 확인해보라'는 말 다음으로 아버지가 덧붙인 말이 '집 값 최고로 올랐을 때 집 물려주는 걸 보니 아들 사랑은 죽어서도 여전하네'였다는 것은, 동우의 심장에 문신처럼 새겨져 한참동안이나 그를 아프게 했다.
동우는 상속세를 내고 남은 돈으로 학교 후문 원룸으로 이사했다. 유산에 합의금, 보험금까지, 갑작스레 생겨버린 목돈은 대학생이 다루기엔 컸지만 동우는 그 돈을 허투로 쓰는 법이 없었다. 말 그대로 그 전부 엄마의 목숨값이란 것을 동우는 너무도 아프게 인지하고 있었다. 동우는 모든 돈을 장기예금에 묶어놓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우리에게는 우리 밖에 없다. 그 문장을 함께 나누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정말 세상에 혼자 남은 것이고, 그렇다면 정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절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적적한 마음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한국대 후문, 명절에도 문을 연 카페는 하나였고,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모였다. 그러니 그날 저녁, 동우가 세희를 만난 것은 그리 대단한 우연도 아닌 것이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동우는 입구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어, 너?"
"어?"
그러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가리켰다.
"집에 안 갔어?"
"뭐, 그냥."
동우의 물음에 세희는 말끝을 흐렸다. 그 순간 동우의 머리속을 스친 어떤 직감, 동질감, 반가움, 그런 다채로운 감정들은 용기로 치환되었다. 동우는 세희의 테이블을 흘겼다. 테이블 위에는 아이스 커피 한 잔이 놓여있었다.
“케이크 먹을래?”
세희가 윗니를 전부 보이며 웃었다. 응, 세희의 대답에 동우는 얼른 주문대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