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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정 Oct 19. 2024

윤정과 세희 (5)

소설 연재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윤정과 세희의 고개가 동시에 치켜 올라갔다. 거기에는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 서있었다. 남자는 짧은 머리가 민망한지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었다. 


"어?"


세희가 벌떡 일어나 남자를 맞았다.


"김동우, 휴가 나왔어?"


세희의 동기 동우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세희는 동우에게도 살가웠다. 저렇게 반갑게 인사하는데 어느 누가 안 고맙겠냐만은, 윤정의 눈에 동우의 입가에 번지고 있는 미소는 유독 크게 느껴졌다.


“응. 재한이 형 볼 겸해서 학교 왔어.” 

“정말? 나는 팀플 하고 있었어.” 

“아,”


동우는 윤정을 흘깃하더니 금세 표정을 정리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입속에 잠깐 머물렀지만 이내 삼켜냈다. 어색하게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세 사람의 뇌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윤정은 세희가 자신을 배려하느라 동우와의 인사를 짧게 마무리 지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짧은 머리, '휴가' 라는 단어. 동우가 군인임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희와도 오랜만의 재회일 테다. 시간도 제한되어 있을 테고. 또 그렇다면, 자신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샌드위치도 다 먹었고. 그러나 대답이 빨랐던 것은 동우였다. 


“그럼, 갈게.” 

“응. 재한 오빠 잘 만나.” 

“그래. 또 보자.” 


또 보자. 그렇게 말하는 동우의 어투는 단단했다. 세희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었다. 동우는 윤정에게도 짧게 고개를 숙였고, 윤정도 얼른 따라 묵례했다. 아마도 자신의 몫일 커피에 대한 감사를 담아서. 그러는 동안 세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던 것은 보지 못했다.


동우가 떠나고, 세희와 윤정의 '팀플'이 재개됐다. 이제는 마실 것도 있었다. 두 사람은 동우가 남기고 간 커피를 홀짝이면서 팀원으로서 유대를 쌓았다. 팀 활동이라기엔 학업과 관계 되는 것은 없었지만, 적어도 앞으로의 활동에 긍정적으로 작용될 시간임은 분명했다. 이런 것도 팀 활동의 일부라면, 윤정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학번이 높아서 제일 먼저 출석 부를 줄 알았거든요."


세희가 말했다. 본인보다 먼저 출석이 불리는 사람이 있어 반가웠다고, 말을 걸 용기까진 없었는데 먼저 팀을 같이하자고 해서 고마웠다고. 윤정의 세상에선 세희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었는데, 세희의 세상에선 윤정이 '먼저'였다. 세희가 샌드위치를 '먼저' 건네기 이전에 윤정이 '먼저' 세희에게 말을 걸었다고.


윤정은 세희의 말을 들으며 다정한 화법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하게 따진다면 팀 활동은 누구에게라도 말을 걸어야 했던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샌드위치 나눔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 굳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럼에도 세희는 기꺼이 타인을 용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본인은 그 용기의 수혜자로 남겨 고마움을 전달하고 있다.


윤정은 한 마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옛말을 의심했던 적이 있다. 한국대에 와서는 더 그랬다. 타인을 모욕주기 위해 괜한 힘을 들이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혼자만 누려도 좋은 것을 굳이 나누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 무언가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나쁜 것은 지양할 것, 굳이 좋은 것은 지향할 것.'


윤정은 어느새 이 대화가, 상대가, 나아가서 공간이 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주로 듣기만 하던 윤정이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원래도 낯을 안가리세요?"


음음, 세희가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저도 누울 자리는 보고 발 뻗죠."


세희와 윤정의 얼굴 위로 동시에 웃음이 번졌다. 동갑인 것을 확인하고 먼저 친구를 제안한 사람은 이번엔 세희였다. 윤정은 이번에도 세희에게 순서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굳이 좋은 것을 지향할 순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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