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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정 Sep 13. 2024

윤정과 세희 (4)

소설 연재

"저도 1학년 수업 재수강 엄청 많이 하고 있거든요! 1학년 때 학사경고받는 바람에."


세희는 목이 막히는지 캑캑거리며 말했다. 음료수라도 뽑아와야 하나, 윤정이 두리번거리자 세희는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지금 세희에게 중요한 것은 윤정과의 대화였다. 세희는 조직행동론 수업은 1학년 때 들었는데 F를 받아 재수강하는 거라고 설명했다. 3학년은 혼자인 줄 알았는데 윤정이 있어서 반가웠다고 덧붙였다. 재무관리도 F라고 했다. 회계원리는 C를 받았는데 중급회계 수업을 듣다 보니 자연스레 기초가 잡혀 다시 수강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A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1학년 때 왜 학사경고를 받았는지는 다음에 말해주겠다고 했다. '다음에'라는 단어를 듣자 윤정은 왜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다른 수업은 뭐 들어요?"


"아, 잠깐만요."


윤정은 에브리타임에 접속해 시간표를 틀었다. 휴대폰을 넘겨받은 세희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윤정과 조별 과제를 같이 하고 있는 조직행동론 수업 외에도 회계원리 수업 하나가 겹쳤다. 세희는 수업을 같이 듣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같은 3학년이니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윤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편입생에 방점을 찍고 출신 학교나 적응 상태를 묻지 않는 사람도 처음이었고, 무언가를 같이 하자고 하는 사람도 처음이었다. 애초에 세희는 과거에 윤정이 어디 있었는지 확인해야 하는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의 시간이 더 중요했다.


"저야, 좋죠."


윤정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동갑이란 것을 확인하고, 먼저 말을 놓자고 제의한 사람은 윤정이었다. 좋다고 답한 사람은 이번에는 세희였고. 학교야 혼자 다니면 되지, 애도 아니고. 그렇게 포기하고 있던 마음이, 사실은 전혀 원하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혼자였던 시간의 관성에 젖어 있을 뿐,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상처받지만 다시 인간을 찾아 헤맨다. 또 상처받고 다른 인간을 찾는다. 그렇게 돌고 돌아 더 이상 남은 선택지가 없을 때 불가피하게 닿는 곳이 혼자가 아닐까, 윤정은 생각했다.


다행히 윤정은 세희와의 대화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그간 자신이 범하고 있었던 오류 하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어느 집단이든 무례한 사람과 선한 사람은 존재한다. 지금껏 윤정은 무례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속한 집단 전체를 향해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그것이 성급한 일반화였음을 세희가 반증하고 있다. 윤정은 그저 한국대에 존재하는 무수한 부류의 인간 중 무례한 인간을 먼저 만났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꼭 윤정이 아니더라도 다른 누구에게라도 무례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 상처를 받고 끙끙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인에게서 가능성보다 한계를, 장점보다 단점을 먼저 찾아서 굳이 입 밖으로 꺼내야 속이 후련한 사람들은 어디에라도 있다. 물론 윤정 근처에도 있다.


선한 사람을 만났을 때는 정반대였다. 대표적인 예가 룸메이트 희선이었다. 착함에도 여러 색깔이 있겠지만 희선의 색은 그중에서도 맑은 색이었다. 불순물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은 그야말로 순수 선. 함부로 평가하지 않았고 도움을 줄 때도 타인의 기분을 먼저 생각했다. 희선의 정제된 언어와 몸에 밴 배려는 윤정을 안도케 했다. 어찌 보면 한국대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가 희선이었음에도 윤정은 거기서는 섣부른 일반화를 삼갔다. 그 선은 희선에게만 국한된 개별적 특성일 것이라고 엄격하게 선을 그었다.


돌이켜보면 꼭 한국대에서가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관계에서 머뭇거렸던 것 같다. 저 친구에겐 나보다 더 친한 다른 친구가 있을 거야, 지레 짐작하고 적극적으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얼굴에 어떤 표정을 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대방은 그 표정을 불편하다, 부담스럽다로 해석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해명해 봤자 그렇게 보였는걸, 한 마디면 할 말이 없어지는 그런 표정.


윤정은 자신의 지나친 방어 기제가 타인의 선한 의도까지 오염시킬 수 있단 것을, 그러는 동안 자신도 타인에게 무례를 범할 수도 있단 것을 세희와 대화하는 동안 조금씩 깨달았다.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굳이 힘을 쏟을 필요도 없겠지만, 누군가를 미리 배척하고 있을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손에 샌드위치가 있다면, 기꺼이 나눠 먹을 수 있다면, 마침 공통점이 있다면, 알고 보니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면, 설령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계산 없는 그저 다정한 마음. 그 정도면 충분한 거였다. 윤정은 세희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테이블 위로 캔 커피 두 개가 놓였다.


"세희, 수업 벌써 끝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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