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by 박명혜


올핸 비가 꽤 늦게까지 내렸다. 거기에 내 게으름까지 보태져, 미루고 미루다가 텃밭에 늦게 몇 가지 심었다. 아직도 이것저것 서툴지만, 그래도 올해로 텃밭 농사 20년째. 처음엔 그저 보이는 대로, 심고 싶은 대로 심었다. 하지만 작은 텃밭이라도, 마음 가는 대로만 하다 보니 몇 해가 지나자,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때부터였다. 한 5년 정성을 다해 공부하고, 노력했다. 책도 보고, 유튜브로 남들 텃밭도 들여다보며 배우고 흉내 냈다. 그렇게 계절을 몇 번 더 보내고 나니, 지금은 몇 가지 나만의 텃밭 가꾸기 노하우도 생겼다.


그중 하나, 난 텃밭을 시작할 때면 가장 먼저 메리골드를 심는다. 주로 아프리칸 메리골드(African Marigold)와 프렌치 메리골드(French Marigold) 두 가지를 심는데, 키가 큰 아프리칸 메리골드는 키만큼 꽃송이도 큼직하다. 꽃은 주로 노랑색과 오렌지색으로 진한 향이 있어서 넓은 텃밭의 테두리나 화단 가장자리에 심어두면 해충 퇴치에 효과적이다. 반면에 키가 작고 꽃도 작지만, 노랑, 주황, 적갈색 등 색이 화려하고 다양한 품종을 가지고 있는 프렌치 메리골드는 아프리칸 메리골드보다 약간 더 부드럽고 달큰한 향을 갖고 있는데, 이 역시 텃밭 해충 방지, 특히 선충류 억제에 탁월하다. 선충류는 뿌리에 기생해서 식물이 양분과 물을 잘 흡수하지 못하게 만드는 실처럼 생긴 미세한 벌레다. 특히 토마토, 고추, 상추, 오이, 당근에 많이 붙어 있는데, 메리골드 특유의 향이, 자연스럽게 해충을 멀리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항상, 심을 작물을 고르기 전에 메리골드를 먼저 심는다. 텃밭의 질서를 잡는 일이자, 한 해 농사의 안부를 묻는 작은 의식처럼 말이다.


토마토를 심을 땐 바질도 함께 심는다. 함께 심으면 토마토의 맛을 더 진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또 장미 옆에 부추나 마늘을 심으면, 장미에 붙는 진딧물이나 곰팡이성 질환을 줄여 주기 때문에 부추 화분을 만들어 함께 놓는다.


그렇다고 모든 식물이 메리골드나 바질처럼 사이가 좋은 건 아니다. 마늘과 콩은 서로

멀리해야 한다. 마늘의 강한 뿌리 성분이 콩의 생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감자와 해바라기도 함께 두면 좋지 않다. 햇살을 향해 한껏 고개를 치켜든 해바라기는 보기엔 멋지지만, 영양분을 과하게 흡수하는 탓에 감자는 시들고 만다.


햇빛과 바람을 서로 나누면서 각자의 향도 더 뚜렷해지는 메리골드와 바질 같은 관계. 사람 사이에도 있다. 함께 있을 때 오히려 나다워지고, 더 건강해지는 관계,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분이 편안해지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온도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하지만 마늘과 콩처럼, 해바라기와 감자처럼,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함께 있으면 어느 한쪽이 서서히 시들어가는 관계도 분명 있다. 마늘의 강한 뿌리 성분이 콩의 성장을 방해하듯, 이유 없이 내 마음의 숨통을 막는 관계도 있고, 해바라기의 이기적인 흡수력처럼, 누군가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에너지를 앗아가는 관계도 있다.


육체의 상처보다 더 아픈 것이 인간관계의 고통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오래 지속되고, 더 깊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메리골드와 바질처럼 궁합이 맞는 사람만 만나, 함께한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늘 관계 속에 기대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마음이 마르고, 생각이 뒤엉켜 세상사가 힘들어질 때가 많다.


다행히 나이 들어가며 그나마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알아보는 감각이 생겼고, 피하는 요령도 늘었다. 덕분에 힘든 인간관계를 줄이긴 했지만, 아직도 불쑥불쑥 화나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여전히 생긴다. 하지만 이젠 나이만큼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조금 더 단순한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며 살고 있다.


식물들처럼 우리도 각자 뿌리를 다르게 내리고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는 햇빛이 많아야 하고, 누군가는 그늘이 있어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서로가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단지 함께 있기엔 너무 다른 성질, 그것을 인정하는 것. 그게 행복한 인간관계의 첫걸음이지 싶다. 그리고 이걸 인정한다면, 꼭 무리해서 어울리기보다, 차라리 조용히 거리를 두는 편이 서로에게 나을 수도 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고,

너무 멀어지지도 않게,

서로를 억누르지 않고,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면서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거리.

그게 서로의 뿌리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같은 햇살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삶의 텃밭에서 우리는 매일 관계를 심고, 가꾸고, 때로는 뽑아내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6월, 매일 조금씩 더 짙어지는 텃밭의 푸르름처럼, 나의 인간관계도 잘 자라서 건강하고 좋은 향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미주현대신문 6월 게재

Image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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