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정말 놀랐다.
푸르디푸른 나무들로 빽빽할 줄 알았던 캘리포니아의 산과 들이, 7월의 햇살 아래 누렇게 바래고, 생기를 잃고, 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아사삭하고 바스라질듯 보였다. 캘리포니아의 모든 산과 들은 늘 초록빛일 거라 믿었던 내게 이 누런 산과 들은 배신이었다.
애리조나에서 4년을 살고,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결정했을 때, 한국 식당과 상점, 날 닮은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이 반가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푸른’ 캘리포니아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뛰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리조나의 날씨는 한국의 사계절에 익숙한 나에겐 너무나 혹독했다. 더군다나 여름은, 처음엔 숨이 막힐 정도였다. 햇빛은 거의 매일 무심하게 쏟아졌고, 그 아래 세상은 불처럼 타올랐다. 그 열기를 그저 ‘드라이하다’라고만 말하긴 부족했다. 피부를 찌르는 송곳 같았고, 주차되었던 차에 다시 탈 땐 미리 열기를 빼지 않으면, 화상을 입는 것 같은 통증을 경험해야 했다. 식지 않는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늘 에어컨 안에 머물렀고, 그 열기는 밤과 새벽까지도 지속됐었다.
하지만 그 혹독함 속에도 아름다운 자연은 있었다. 마른 풀잎 내음이 가만히 스며드는 사막의 새벽은, 세상 어느 곳보다 고요했다. 맑고 투명한 레몬꽃, 더 달콤한 오렌지꽃, 씁쓸한 여운이 남는 자몽꽃. 봄이면 바람을 타고 동네 골목골목을 채우는 이 시트러스 (citrus) 향은 혹독한 여름을 이겨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했다. 사구와로 선인장( Saguaro) 꽃 역시 여름을 견디게 해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가시로 온몸을 덮은 키 큰 몽둥이처럼 생긴 선인장이지만 봄이면 이슬처럼 하얀 꽃을 피운다. 낮엔 꽃잎을 꼭 다물어 수분을 지키다가 밤이 되면, 속삭이듯 천천히 펼치는 하얀 꽃잎.
또 해 질 무렵의 애리조나 하늘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색을 하늘에 펼쳐, 뜨겁고 메마른 땅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변하게 한다. 그럼에도, 애리조나의 자연은 끝내 내 마음을 온전히 빼앗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푸르름을 오래도록 동경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리던 날, 바다를 끼고 선 그 도시의 풍경은
사막을 떠나 온 나에게 자연이 주는 보너스 같았다.
렌터카를 몰고 베이 브리지를 건너며 느낀 시원한 바람은 꿈꿔오던 캘리포니아를 곧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Vallejo를 지나며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내가 꿈꾸던 그 푸르름과는 너무 달랐다. 산등성이엔 나무 하나 제대로 없고, 누렇게 말라버린 풀들이 햇빛에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 지역만의 문제인 걸까? 호두, 아몬드 등 농업 역사가 깊은 Dixon도 농사를 지으려 인간이 물을 끌어다 놓은 곳 말고는 말라가는 풀들, 나무 한 그루 없이 쨍한 햇살에 푸석한 흙바람까지 더할 뿐이었다. 하이웨이 5번에 높게 서 있는 물탑의 “city of trees”라는 말이 무색하게 (2017년부터 이 물탑엔 “ America's Farm-to-Fork Capital “ 이란 슬로건으로 바뀌어져 있다. ) 북캘리포니아 여름은 생기 잃은 누런빛이었다.
몇 해를 지나서야 그때 내가 알지 못해, 보지 못한 것들이 엄청나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의 여름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다. 때문에 겨울과 봄 사이 짧은 우기에 최대한의 생명력을 피워낸 뒤, 여름이 오면 식물들은 말을 멈추듯 조용히 잎을 거두고, 뿌리 깊은 곳으로 숨는다. 누렇게 바랜 언덕은 죽은 것이 아니라, 고요히 잠든 것. 햇살에 스러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 누런 산과 들은 다음 계절을 위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여름은 푸르름과 작별하며 시작된다. 햇살은 점점 강해지고, 들판은 누렇게 익어가고, 산등성이는 아사삭 말라버린다. 하지만 여름만의 아름다움이 곳곳에 있다.
7월의 나파 밸리, 타는 듯 뜨거운 햇살은 익어가는 포도알에는 와인의 향을 입힌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새크라멘토를 잇는 하이웨이 80. 그 뜨거운 도로를 따라 피어오른 협죽도(유도화:Oleander)는 물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땅에서도 진분홍과 흰 꽃을 아낌없이 피워낸다. 잎, 꽃, 줄기 모두에 독성을 품고 있지만, 그 강인함이 도로를 지키고, 벌레를 막고, 여름의 뜨거운 바람을 견디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올리브나무 역시 낮의 강한 햇살에도 끄떡없이, 은빛 이파리를 흔들며 후끈한 여름바람조차 반긴다.
그리고 저녁 무렵.
햇살이 서서히 기울면, 삭막해 보이기만 하던 언덕과 계곡이 금빛으로 물든다.
바람 한 점 없는 산등성이 위로, 마치 누군가 천천히 황금빛 비단을 펼쳐놓듯 고운 빛이 흘러내린다. 그러면 잠시지만 숨죽여 있던 여름의 마른 숨결도 그 다정한 빛에 젖어, 촉촉한 숨을 고른다.
소란하지 않은 여름, 그게 캘리포니아의 여름이다.
나는 이제 안다.
아름다운 자연은 푸르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말라가는 풍경 속에도 끊임없이 살아 있는 움직임이 있고,
이 여름의 침묵, 소란하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말이다.
산은 다시 누렇게 물들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사랑하는 캘리포니아의 여름이야.”
미주 현대신문 기고문 입니다.